일본 도쿄서 영친왕 이방자비 추모제 열려

이승민 특파원 happydoors1@gmail.com | 2019-05-01 11: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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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친왕 이방자비의 젊은 시절 모습(판낼 전시 사진). (사진=이승민 특파원)

[로컬세계 이승민 특파원]지난 4월 30일, 도쿄 신주쿠에 위치한 성약빌딩 1층에서 영친왕 이은 49주기, 이방자비 30주기 추모제가 열렸다.


일본의 서정시인이자 낭독시인 사쿠라 쇼우코 씨의 사회로 진행된 이 행사는 이방자비숭덕회(회장 김창환)와 평화통일연합(총장 김원식)이 공동으로 주최했다.


이날 추모제는 일본인 재일교포 등 100여 명의 추모객이 참석한 가운데 묵도, 헌화, 경과보고, 인사말, 시낭독, 기념촬영 순으로 진행됐다. 2부 순서로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를 소개하는 사진 등 판넬 전시회가 이어졌다.

 

▲이방자비 숭턱회 김창환 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김창환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이방자비는 1901년 11월 4일 일본 황실의 공주로 탄생해 1920년 4월 28일 조선왕조의 황태자 영친왕 이은과 결혼했다. 1963년 11월 22일부터 한국에서 살았고 1989년 4월 30일 87세의 생애를 마쳤다”고 소개하면서 “이방자 여사는 영친왕 이은과 함께 한일간에 정치적인 희생 양이 되어 살아야 했던 불운한 운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2개의 조국을 가슴에 안고 살았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에서는 한국인의 인권을 위해서 살았고, 한국에서는 정신적 육체적 장애자들의 어머니가 되어 재활과 복지를 위해 성심을 다해 살았다. 파란만장했던 일생이었지만 한결같이 의로웠던 삶이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본이 되고 또 커다란 교훈이 됐다”고 강조했다.

 

▲사쿠라 쇼코 씨가 이방자비에 대한 시 '이방자비 모란훈장까지의 길'을 낭독하고 있다.

사쿠라 쇼코(桜 しょうこ)씨는 자작시 ‘이방자비 모란훈장까지의 길’을 시냇물 흐르듯 잔잔하게 낭송해 참석자들로 하여금 이방자 여사의 감동적인 일생을 상상하게 해주었다.

 
기무라 미코 씨는 “숭고했던 이방자 여사의 삶을 뒤돌아보는 뜻 깊은 시간이 됐다. 일한간에 사랑의 다리를 놓아주신 이방자 여사의 삶을 우리들이 본받아 한일간에 더욱 좋은 관계로 발전시켜야겠다”고 말했다.

 

▲영친왕 이은 이방자비 추모제를 마치고 추최 관계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편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 이방자(李方子)는 1901년 11월 4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본래 이름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로 영친왕 이은(李垠)과 결혼한 뒤 남편의 성씨를 물려받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메이지 천황의 조카인 나시모토노미야 모리마사(梨本宮守正)이고, 어머니 이스코(伊都子)는 나베시마 나오히로(鍋島直弘)의 딸이다. 할아버지 구니노미야 아사히코(久邇宮朝彦) 천황은 닌코천황의 조카이자 메이지 천황의 사촌이다. 이방자는 황실의 꽃처럼 사랑을 받으며 어린시절을 보냈다.


1907년 12월 15일, 조선의 황태자 이은이 10세의 어린 나이에 유학을 이유로 이토 히로부미에 이끌려 일본에 도착했다. 이때 도쿄 신바시 역에 황태자를 비롯해 황족들이 마중을 나갔다. 이방자도 어머니 이스코와 함께 참여했다. 이방자는 황실의 행사가 있을 때 종종 이은을 만났다. 이은은 그녀의 집에 들른 적도 있었고,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마사코는 한때 히로히토 황태자의 가장 유력한 배필로 떠올랐다. 그런데 1915년 가을부터 이은과 이방자의 혼인 이야기가 떠돌더니 마침내 1919년 1월 25일 결혼식이 결정됐다.

예식을 사흘 앞둔 1919년 1월 22일 고종황제가 승하했고 결혼식은 1년 뒤로 연기됐다. 고종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널리 퍼지면서 조선 민중들의 분노가 들끓었다. 마침내 국장을 이틀 앞둔 3월 1일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 폭발했다.


1920년 4월 28일 이은과 이방자의 결혼식이 도쿄 롯본기의 이왕가 저택에서 치러졌다. 조선인들은 반대했다. 대한제국 황실의 정체성을 우롱하고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이벤트라고 생각했다.

조선총독부는 두 사람의 결합을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표본이라고 칭송하면서 결혼기념으로 3천 명의 정치범을 감형하거나 석방했다.


이방자는 결혼 1년 4개월 뒤인 1921년 8월 18일에 맏아들 진(晉)을 낳았다. 이듬해인 1922년 4월 말, 아들 진과 함께 현해탄을 건너 경성에 도착한 이은 부부는 창덕궁에 들어가 순종을 배알하고 종묘에 혼인을 고했다.
그런데 일본으로 돌아가기 하루 전, 5월 8일 비극이 덮쳤다. 우유를 먹은 진이 갑자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청록색 덩어리를 토하며 신음하더니 5월 11일 오후 3시경 숨지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고종의 독살에 대한 보복이거나 일본인의 핏줄을 끊으려는 조선인의 소행으로 단정한 이방자는 왜 자신을 겨냥하지 않았느냐고 울부르짖으며 차디찬 자식을 부둥켜 안고 오열했다. 


1925년 3월 30일, 덕혜옹주가 일본으로 건너왔다. 덕혜옹주는 오빠 이은의 집에 머물며 학습원에 다녔다. 그녀를 돌보는 일은 시누이 이방자의 몫이었다.


1926년 3월 1일 이은 부부와 덕혜옹주는 경성으로 가서 병석에 누워있던 순종을 찾아뵙고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순종이 3월 14일 서거하자 재차 현해탄을 건너가 6월 10일에 열린 국장에 참여했다.


순종의 죽음으로 왕세자였던 이은은 이왕이 되었고 부인 이방자는 왕비의 신분을 얻었다. 하지만 일본 황실에 부속된 이왕가의 상징적인 수장이었으므로 즉위식은 없었다. 그 후 이방자는 왕비의 자격으로 1947년 5월 3일 일본국 헌법이 발효될 때까지 모든 황실 의식에 참여했다.


1930년 3월 3일, 이은 부부는 아자부 도리이자카에 있는 저택을 궁내성에 반환하고 도쿄의 치요다구 기오이초에 새로 지은 저택으로 이사했다. 그 무렵 덕혜옹주는 학교에 가기 싫어하고 밤에는 잠을 이루지 못하더니 갑자기 한밤중에 무작정 집을 나가기까지 했다. 시누이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이방자가 병원에 데려가 보니 조발성 치매라는 진단이 나왔다. 정신이상 초기 증세였다.


덕혜옹주의 증상을 황실에 알려졌지만 그녀를 정략결혼으로 내몰았다. 상대는 쓰시마 번주의 후예인 백작 소 다케유키였다. 이미 마음의 보금자리를 잃은 덕혜옹주의 미래는 한없이 불안해 보였다.


1931년 12월 29일, 이방자는 둘째 아들 구(玖)를 낳았다. 맏아들 진을 잃은 지 10년 만에 경사였다. 이듬해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이방자는 몹시 바빠졌다. 황후를 대신해 상이군인 위문 및 전사자 위령, 자혜회 총회, 적십자사총회, 여자학습원 졸업식 등에 참여해야 했다. 미군의 공습에 대비해 방공훈련을 지휘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을 지배하게 된 맥아더 사령부는 새로운 헌법제도를 추진, 이은 부부는 왕족의 특권을 상실했다. 이은은 평범한 한국인으로서 귀국을 원했지만 정치현실이 가로막았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과 왕정복고 분위기를 경계한 이승만 대통령은 귀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1955년 6월, 이은 부부는 덕혜옹주의 남편 소 다케유키에 대한 국내외의 여론이 악화되자 두 사람의 이혼을 중재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의장이 정권을 장악하자 상황은 바뀌었다. 1962년 1월 26일 덕혜옹주가 먼저 귀국했고, 1963년 11월 22일 이은 부부 역시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이방자 여사는 한남동에 있는 외국인 아파트를 거처로 삼고, 평소 남편과 함께 사회봉사활동을 시작했다. 1963년 신체장애자재활협의회 부회장에 취임했고, 1966년 장애인들의 재활을 돕는 자행회를, 1967년 언어장애인과 소아마비장애인들의 사회적응을 돕는 명휘원을 설립했다. 부족한 자금은 해외모금활동과 칠보판매자금으로 충당했다.


1970년 이은이 세상을 떠나자 사회사업과 남편에 대한 추모 사업을 병행했다. 1971년 지적장애아들을 위해 수원에 자혜학교를 설립했고, 1973년에는 숙원이었던 영친왕 기념사업회를 발족시켰다. 1982년에는 광명시의 명혜학교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말년에 창덕궁 낙선재에 머물며 덕혜옹주의 곁을 지켜주던 이방자는 1989년 4월 21일 덕혜옹주가 세상을 떠나자, 9일 후인 4월 30일에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내에 영왕과 합장했다.


2006년 11월 일본 후지테레비에서 영친왕 부부의 사랑을 그린 드라마 ‘무지개를 이은 왕비(虹を架ける王妃)’가 방영됐고, 2007년에는 한국방송에서 미니시리즈 드라마 ‘왕조의 세월’을 방영했다.

생전에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훈했다. 서울특별시 문화상, 적십자 박애장 금장, 5.16민족상, 소파상 등을 수상했고 국민훈장 무궁화장에 추서됐다. 저서로는 ‘지나온 세월’, ’The World is One’, ‘세월이여 왕조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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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견]

이연숙님 2019-05-02 22:15:07
이방자비 숭덕회 김창환 회장님과 관계자 여러분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기사 내용을 통해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 대해 공부가 되었습니다. 무슨 이유이든지간에 한일간에 결혼식은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정나리님 2019-05-02 22:24:40
정말 이 기사를 통해 우리가 몰랐던 깊은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조선과 일본이 최악의 관계였던 시절에 조선의 황태자와 일본의 공주가 결혼식을 하고 어떻게 살았을까 의구심도 많았지만 지혜롭고 착하게 살았던 이방자 여사가 존경스럽고 감사하고 감동입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파란만장했던 삶이 우리 역사를 요약해서 보여주는 듯합니다. 영친왕 이방자비 추모제를 준비하고 행사를 진행하신 주최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고영철 님 2019-05-03 10:13:28
한일 우호친선의 상징이신 이방자 비 전하의 공적에 경의를 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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