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우 칼럼>고조선과 진국(辰國; 삼한), 동·북부여, 고구려의 상관관계에 의한 만주의 영토권(제17회)

조원익 기자 wicknews1@naver.com | 2020-03-23 16:3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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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기원전 219년에 ‘갈사국’을 세웠다고 한 것은 곧 ‘동부여’를 세운 것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북한 학자들의 주장에 285년 옥저지방으로 피했다가 북옥저에 남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신채호가 주장한 바와 같이 동부여가 두만강 이북의 ‘동북부여’ 즉, ‘북옥저’와 두만강 이남의 ‘남동부여’ 즉, ‘남옥저’로 분리 된 이후의 ‘북옥저’를 지칭하는 것이니 이것이 곧 ‘동북부여’이다.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 것은 남동·북동 부여가 모두 ‘동부여’로 기록되었던 사실에만 의존하여 일어난 현상이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동부여가 분할하여 북동·남동 양 부여가 된 것을 모르고 한 개의 동부여로 기록하였으며, 옥저가 갈사임을 모르고 옥저 이외에 갈사를 찾았으며, 동북·남동의 양 부여가 곧 남북의 양 갈사이고 남북의 양 갈사가 곧 남북의 양 옥저임을 모르고 부여·갈사·옥저 세 개를 서로 다른 지방으로 나눈 것임을 전제로 강릉(江陵)을 ‘가시라’ 곧 가슬나(加瑟那)라고 한 것은 신라 경덕왕이 북방의 토지를 잃은 뒤에 옮겨서 설치한 고적(古蹟)인 줄 모르고, 드디어 가슬라-곧 동부여의 고도(古都)라고 한 것”이라고 했다.

 
북한 학자들이 주장하는 연도가 맞는다고 가정하고, 그 이론을 굳이 꿰어 맞추자면, ‘동부여’는 기원전 219년 고구려와의 전쟁에 패한 후 세운 갈사국이 훗날 동부여가 된 것이며, 훗날 북쪽 일부를 떼어 분립하게 된 것이 ‘북부여’라는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것은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동부여·북부여·고구려가 분립한 시기로 기원전 190년경의 전후 수십 년 동안이라는 견해와도 일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기본적으로 갈사국과 동부여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갈사국 자체가 옥저이며 그것이 동부여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데서 기인한 이론일 뿐이다.


북부여에 대한 명칭의 문제는 앞서 밝힌 바와 같이 건국신화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정리할 수 있다. 신조선을 구성하는 소국 중에 부여라는 나라가 존재했으며 그 소국을 동명왕이 점령하고 해부루로 이어져 통치하던 중에 해모수가 강점하여 북부여라고 이름을 개칭한 것일 뿐이다. 동명왕이 세운 부여가 북부여가 되는 자리이고, 그 자리에서 동명왕의 뒤를 이어 부여를 통치하던 이가 바로 해부루다.

 

해부루는 말년에 동부여로 쫓겨 가는 신세가 되었지만 동명왕을 이어서 오래 집권한 왕으로 볼 수 있다. 늦도록 아들이 없었기에 지성을 드리러 다니다가 금와를 만났다는 기록을 보면 나이가 꽤 들어서 금와를 얻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가 금와를 얻은 곳은 동부여로 오기 이전인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동부여로 와서는 10개월도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금와가 왕위에 오른 후에 유화부인을 만나고 유화부인이 추모왕을 낳았는데, 그 때 유화부인은 이미 아이를 가지고 있는 터였다. 유화부인이 임신을 한 것은 북부여가 건국되기 직전에 임신을 하고 동부여로 온 것이다. 임신한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지만 북부여에서 임신한 후 곧바로 동부여로 와서 금와를 만났다고 해도, 유화부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는 열 달이라는 시간만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 때는 이미 금와가 왕위에 있었으니, 해부루는 동부여에서는 왕으로서 오랫동안 살지 못하고 길어야 10개월을 살았다는 것이다. 동부여 천도 후에 자신이 쫓겨난 것에 대한 설움과 화를 삭이지 못해서 세상을 떠났거나, 이미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금와를 얻었으니 나이가 많아서 세상을 떠났거나, 동부여로 온 이후에는 10개월도 안되어서 세상을 떠났다는 가설이 성립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설을 세우면, 해부루가 나이가 많은 상태에서 금와를 얻었으니, 금와는 어린 나이에 왕이 되었을 것이고 왕이 된 한참 후에 대소를 낳았을 것이다. 대소가 금와의 아들로 추모왕과 함께 놀았는데 그 재능이 따르지 못했다는 것을 보면 대소가 추모왕 보다는 나이가 적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물론 추모왕의 재능이 원래 뛰어난 까닭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어린이들 사이에서는 나이의 적고 많음이 발달과 능력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므로 그렇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삼국사기'「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에서 추모왕이 즉위한 후 59년이 되던 해에 대소가 죽었다고 되어있는데 '삼국유사'에서는 그 해를 임오년이라 했다. 고구려의 건국을 기원전 217년(갑신년)으로 비정한 터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임오년은 기원전 159년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한 해를 '삼국유사'에서 임술년이라 했으니 여기에서 말하는 임술년은 기원전 239년이다.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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