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훈정 칼럼] 색채의 면과 대지, 그리고 작가의 시간
이태술 기자
sunrise1212@hanmail.net | 2025-12-31 08:20:35
나의 작품은 전통적인 실제 풍경과 산수를 소재로 삼고 있다. 오래된 풍경의 기억을 바탕으로 하지만, 그것을 단순히 재현하지는 않는다. 나는 현대적인 미술적 특성을 구현하기 위해 다양한 재료를 탐색하고 있으며, 그 중심에는 ‘면’이 있다. 면은 나에게 있어 단순한 공간을 채워가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와 나, 사물과 공간 사이의 관계를 탐색하는 하나의 언어이다.
나이프에 의한 작품 속 면들은 나뭇잎처럼 흩날리며 춤추고, 어떤 순간에는 자연의 갈라진 틈 속으로 스며 들어가 때로는 최소한의 인위적인 개입으로 깊은 땅속의 뿌리처럼 얽히며 대지 위에 웅장한 산을 형상화한다. 색채의 면은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동시에 가장 명확한 형상으로 다가온다. 점, 선, 면의 경계가 허물어진 평면 위에서, 면은 하나의 흐름이자, 숨결이며, 감각이다.
나는 항상 질문한다. ‘무엇이 사물과 공간을 잇는가?’ ‘그 관계의 결은 무엇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 나이프에 의한 면은 그 질문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그것은 단지 표면을 긋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사물, 공간과 사물 사이의 흐름과 충돌을 감지하고, 그것을 시각화하는 감각적인 도구이다. 면은 존재와 존재 사이에서 미묘하게 움직이며, 그것이 흐른 자리에는 서사의 흔적이 남는다.
대지는 온화하고 따뜻하며, 겉으로는 평화롭고 선명하다. 그러나 그 안을 깊이 들여다보면 수없이 얽히고 충돌하며, 이어지고 끊기는 관계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충돌들은 결국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으며, 나는 이 우주의 한가운데 서서 나의 캔버스 공간에 면을 채우고 있다.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길 위에 서서, 나는 등 뒤로 사라진 시간들을 느끼며, 태초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농부가 대지를 갈고 씨앗을 심은 뒤에도, 비와 바람, 햇빛과 거름이 있어야 비로소 봄은 무르익는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농부의 손길이다. 봄을 만드는 건 자연이지만, 봄을 지키는 건 손의 노동이다. 작가도 마찬가지이다. 반복되는 시도와 집요한 질문, 수많은 실패와 고요한 기다림 속에서 나이프에 의한 손놀림은 계속된다. 때로는 지치고 멈추고 싶지만, 그 절대적인 노동 속에서 비로소 작품은 생명을 틔운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어쩌면 겨울이 봄을 그리워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시간의 앞과 뒤가 만나며, 지금 이 순간의 나이프에 의한 거친 면은 아주 오래된 기억과 아주 먼 미래를 동시에 통과한다. 나는 작은 씨앗보다도 더 작은 희망을 품고 얼어붙은 대지를 찢는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우주를 관통하며 넓은 색채로 캔버스에 채운다. 나에게 면은 생명이고, 호흡이며, 삶을 관통하는 의지이다.
나는 매일매일 나 자신을 기억하는 농부처럼, 그 미세한 1mm의 희망을 따라 어둡고 복잡한 가시덤불을 지나간다. 색채의 면은 나의 손끝에서 시작되지만, 결국 대지와 연결되고 하늘로 이어지며 다시 하나의 순환을 완성한다. 그렇게 나의 작품 속 면들은 오늘도 한 걸음씩, 보이지 않는 길 위를 걷고 있다.
로컬세계 / 이태술 기자 sunrise12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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