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0년 전 멸망한 조국의 혼을 품다… 규슈 깊은 산골 ‘백제 마을’을 가다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4-05 07:07:06
1,300년의 기다림과 만남 시와스 마쓰리 (師走祭り)
“오미소(おみぞ)!”의 함성
고난의 기억, 숯칠하기(헤타레)
국보급 유물로 입증된 백제의 숨결
지명과 신앙에 남은 화합의 메시지
[로컬세계 = 글·사진 이승민 도쿄 특파원] 일본 규슈 미야자키현(宮崎県)의 험준한 산세에 둘러싸인 미사토정(美郷町) 난고(南郷) 지구. 이곳은 1,300여 년 전 한반도에서 건너온 백제 왕족들의 애환과 그들을 신으로 모신 일본 현지인들의 정성이 공존하는 곳이다. 단순한 전설을 넘어 구체적인 유물과 독특한 제례 의식으로 증명되는 ‘일본 속의 백제’를 현지 취재했다.
망명 왕족의 마지막 안식처가 된 난고
660년, 찬란했던 백제가 멸망하자 정가왕(禎嘉王)과 그의 아들 복지왕(福智王) 등 왕족 일행은 거친 바다를 건너 규슈 해안에 상륙했다. 이들은 집요하게 뒤를 쫓는 추격 세력을 피해 첩첩산중인 이곳 난고 지역으로 숨어들었다. 낯선 타국 땅에서의 정착은 고난의 연속이었으나, 백제의 선진 문물을 전해준 이들을 현지 주민들은 따뜻하게 받아들였고, 현재까지도 이들을 지역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추대하고 있다.
1,300년의 기다림과 만남 시와스 마쓰리 (師走祭り)
매년 1월, 이 조용한 산골 마을은 일본에서 가장 감동적이고 독특한 도래인 관련 축제인 ‘시와스 마쓰리’로 들썩인다.
부자의 재회
아들 복지왕을 모신 ‘히키 신사’의 행렬이 아버지가 계신 ‘미카도 신사’까지 약 90km를 이동한다. 일 년에 단 한 번 허락된 부자의 상봉이다.
“오미소(おみぞ)!”의 함성
행렬이 도착하면 주민들은 일제히 오미소!”라고 외치며 환영한다. 이는 ‘왕(王)이 오신다’는 뜻의 고대 백제어 흔적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고난의 기억, 숯칠하기(헤타레)
주민들이 서로의 얼굴에 검은 숯을 칠하는 의식도 치러진다. 이는 왕족 일행이 변장하며 도망쳐야 했던 고난의 역사를 기리는 풍습이다.
상봉의 밤에는 격렬한 가구라(신에게 바치는 춤)가 펼쳐지며, 이튿날 아침 아들이 떠날 때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는 ‘이별의 의식’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국보급 유물로 입증된 백제의 숨결
백제 마을의 역사는 전설에만 머물지 않는다. 미카도 신사(神門神社)에는 백제 왕족이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24면의 청동거울이 보관되어 있다. 특히 당초문경(唐草文鏡)은 충남 공주 무령왕릉 출토 유물과 제작 기법 및 문양이 놀라울 정도로 일치해 한반도와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가 된다.
마을에는 이 귀중한 유물들을 보관하기 위해 나라(奈良)의 국보 ‘쇼소인’을 그대로 재현한 니시노쇼소인(西の正倉院)이 세워져 있다. 단순한 복제품이 아니라 1,300년 전의 설계도와 건축 기법을 그대로 적용하고 수령 1,000년 이상의 편백나무를 사용해 지은 정성의 산물이다. 인근 백제관(百済館)에서는 백제의 복식과 생활상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어 도래인 역사의 교육장 역할을 하고 있다.
지명과 신앙에 남은 화합의 메시지
‘미카도(神門)’라는 신사 명칭 자체가 일본어로 왕(天皇)을 의미하듯, 이곳은 고귀한 인물이 머물렀던 성역으로 추앙받는다. 미사토정의 백제 마을은 일본 정부가 그 역사적 가치를 공식 인정하고 보존하는 곳이다.
오늘날 이곳은 단순히 관광지를 넘어, 망국(亡國)의 한을 안고 찾아온 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준 일본 현지인들과 선진 문화를 전해준 백제인들이 빚어낸 ‘화합의 상징’으로 남았다. 1,300년 넘게 이어져 온 부자의 상봉은 한일 양국의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깊은 인연을 여전히 웅변하고 있다.
[방문 정보]
미카도 신사 & 니시노쇼소인: 백제 왕족 유물 및 복원 건축물 관람.
백제관: 백제 역사 및 한일 교류사 전문 자료관.
위치: 일본 미야자키현 미사토정 난고 지구 (宮崎県東臼杵郡美郷町南郷).
축제 시기: 매년 1월 중순경 (시와스 마쓰리).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로컬(LOCAL)세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