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문윤국 ④] 오산학교, 인재의 숲을 가꾸다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4-17 10:06:26
인재의 숲을 가꾸다
오산에 휘몰아친 제국주의의 광풍
105인 사건과 오산의 시련
폐교 위기와의 사투
오산에서 틔운 싹, 3.1 운동의 꽃이 되다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오산리. 이곳에서 한국 근대사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사의 물줄기를 바꾼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진다. 이미 성경을 통해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깨달았던 지사 문윤국과, 안창호의 연설에 감명받아 교육 구국을 결심한 남강(南岡) 이승훈이 마주 앉은 것이다.
남강 이승훈은 평양 쾌재정에서 안창호의 사자후를 듣고 돌아와 "나라를 구하는 길은 오직 인재를 기르는 교육뿐"이라 확신하며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려 했다. 이때 그에게 가장 필요한 인물은 신학적 기초와 유학적 기개를 동시에 갖춘 지식인 문윤국이었다. 두 사람은 신분과 배경을 초월하여 '교육을 통한 국권 회복'이라는 대의 아래 독립운동의 요람, 오산학교(五山學校) 설립의 닻을 올렸다.
"돈이 없으면 내 땅을 파시오"
오산학교 설립 초기, 재정적인 위기는 수시로 찾아왔다. 특히 일제의 압박으로 학교가 운영난에 처할 때마다 문윤국의 헌신은 눈부셨다.
"학교 운영비가 부족하여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멈춰서는 안 됩니다. 돈이 없으면 우리 가문의 땅을 팔아서라도 보태시오."
문윤국은 남평 문씨 가문의 유복했던 가산을 아낌없이 학교에 쏟아부었다. 그는 문중의 반대와 우려 섞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전답(田畓)을 매각하여 교사를 짓고 학생들의 학비를 지원했다. 그에게 토지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아니라, 민족의 미래를 심을 '인재의 숲'을 가꾸는 밑천이었다. 훗날 남강 이승훈이 가산을 털어 학교를 지켰듯, 문윤국 역시 "내 자식에게 땅을 물려주기보다 정신을 물려주겠다"는 선비의 기개로 오산학교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인재의 숲을 가꾸다
문윤국과 이승훈은 학교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인재들을 교사로 초빙했다. 훗날 '조선의 간디'라 불린 고당 조만식을 교장으로 영입하고, 다석 유영모, 이광수 등 쟁쟁한 지식인들이 이곳에서 민족 교육에 매진했다.
문윤국은 단순한 교육자를 넘어 학생들에게 유교의 '절개'와 기독교의 '희생'을 결합한 고유의 독립 사상을 전파했다. 훗날 시인 백석, 화가 이중섭, 함석헌 등 한국 현대사를 수놓은 수많은 거목이 이 '오산의 숲'에서 자라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문윤국이 뿌린 눈물과 헌신이라는 거름이 있었다.
오산에 휘몰아친 제국주의의 광풍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한반도 전역에 무단통치를 실시하며 민족 교육의 산실인 오산학교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특히 정주 지역의 거센 독립 의지는 일제에게 큰 위협이었고, 마침내 1911년, 독립운동 세력을 일거에 소탕하기 위해 조작된 '105인 사건(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의 칼날이 오산을 정면으로 겨누게 된다.
105인 사건과 오산의 시련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헌병들에 의해 오산학교의 기둥이었던 남강 이승훈이 체포되었다. 뒤이어 교사들과 주요 청년들이 줄줄이 포승줄에 묶여 평양과 서울로 압송되었다. 활기찼던 교정에는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 대신 적막과 공포만이 감돌았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학교에 홀로 남겨진 문윤국은 텅 빈 교실을 지키며 통곡했다. 동지들이 차디찬 감옥에서 고문을 당할 때, 그는 학교를 폐교시키려는 일제의 압박에 맞서 온몸으로 교문을 막아서며 저항했다.
"스승들이 잡혀갔다고 배움을 멈춘다면 그것이야말로 나라를 영영 잃는 길이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오산의 등불만은 끌 수 없다."
문윤국은 투옥된 동지들을 대신해 교장과 교사, 그리고 관리인의 역할까지 도맡으며 학교의 명맥을 이어나갔다. 낮에는 학생들을 다독여 가르치고, 밤에는 차가운 예배당 바닥에서 동지들의 안녕과 민족의 앞날을 위해 피눈물 나는 기도를 올렸다.
폐교 위기와의 사투
일제는 "주동자들이 체포되었으니 학교를 폐쇄하라"며 끊임없이 협박과 회유를 반복했다. 하지만 문윤국은 유교적 절개와 기독교적 신념으로 무장하고 그들과 맞섰다. 그는 가문 대대로 이어온 모든 인맥과 명망을 동원해 학교를 지켜냈으며, 남은 재산을 털어 교사들의 빈자리를 채울 임시 강사들을 구했다.
그에게 오산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투옥된 이승훈과의 약속이었고, 나라를 되찾을 유일한 보루였다. 문윤국이 홀로 지켜낸 이 시기의 오산은 훗날 3.1 운동의 가장 강력한 인적 자원을 배출하는 '인내의 용광로'가 되었다.
홀로 남은 자의 기도
문윤국은 매일 밤 오산의 언덕에 올라 평양 감옥이 있는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했다. 그의 기도는 개인의 안위가 아닌, 고통받는 동지들과 어둠에 잠긴 민족을 향한 것이었다.
"주여, 저들이 총칼로 우리를 위협하나 우리의 정신까지 뺏지는 못합니다. 감옥에 갇힌 저들을 강건하게 하시고, 남겨진 이 어린 양들이 장차 이 나라를 비출 빛이 되게 하소서."
이 시기 문윤국이 겪은 지독한 외로움과 시련은 그를 단순한 지식인에서 '고난받는 민족의 목자'로 거듭나게 했다. 이 고독한 기도의 시간들이 쌓여 훗날 1919년 정주 평야를 뒤흔든 만세 운동의 영적 에너지가 되었던 것이다.
오산에서 틔운 싹, 3.1 운동의 꽃이 되다
문윤국이 오산학교에 쏟은 열정과 재산은 단순한 기부가 아니었다. 그것은 곧 다가올 기미년(1919년)의 거대한 폭발을 위한 영적, 인적 무장이었다. 오산에서 길러낸 제자들은 훗날 정주 지역 만세 운동의 주역이 되었고, 문윤국은 그들의 선봉에서 십자가를 지게 된다. 가산을 다 비워내고 인재로 채운 그의 삶은, "사람이 곧 나라"라는 진리를 몸소 보여준 위대한 헌신의 기록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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