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노사 문화의 숙제는 상생을 만들어 가길

로컬세계

local@localsegye.co.kr | 2026-05-27 14:08:56

기술의 시대, 인간은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박범철 작가

삼성전자 노사가 교섭을 한 지 반년 만에 극적인 마침표를 찍었다. 6일간 이어진 침묵의 투표 끝에, 6.2만 명의 노동자가 투표소로 향했고 73.7%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잠정 합의안을 품어 안았다. 최대 100조 원의 천문학적 손실을 초래할 수 있었던 반도체 총파업이라는 초유의 파국은 간신히 비켜 갔고, 40조 원 규모에 달하는 전무후무한 성과 보상안이 확정되었다. 대한민국 제조업의 심장이자 글로벌 기술 영토의 최전방인 삼성전자. 이 일련의 거대한 진통이 우리 사회와 세계에 던진 본질적인 화두는 무엇일까. 그것은 유한한 재화의 분배나 단기적인 임금 격차의 논리를 가볍게 넘어서는 일이다. 이번 사태는 AI 시대를 앞당기는 역설적 가속 페달이자, 인간 노동의 가치 사슬을 근원부터 뒤흔드는 문명사적 대전환의 서막이다. 인류사의 격변기마다 반복되었던 고용의 비극이, 이제 기술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해일이 되어 인간 존엄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다.

과거 산업사회에서 인간의 노동은 생산의 혈류이자 사회라는 유기체를 지탱하는 숭고한 근간이었다. 파업이 공장의 숨통을 멈추고 협상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던 핵심 동력은, 그 고단한 노동 속에 서려 있던 인간 고유의 대체 불가능한 온기 덕분이었다. 그러나 AI와 자동화는 이 투쟁의 서사를 정교하게 지워나가고 있다. 인간의 사유와 오랜 숙련이 머물던 자리가 차가운 AI 인프라와 알고리즘의 정밀한 논리로 대체되는 지금, 우리는 격세지감(隔世之感)의 충격을 넘어 인간의 자리를 상실해가는 문명적 소외를 목도하는 중이다. 역설적이게도 이번 파업의 위기는 기업들에게 노동 의존도를 낮추고 기술 대체를 감행할 완벽한 구조적 명분을 제공했다. 이미 미국의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단행하고 있는 냉혹한 대규모 구조조정이 이를 증명한다. 자본이 기술의 날개를 달았을 때, 인간의 노동이 효율이라는 미명 하에 얼마나 무력하게 소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서늘한 방증이다.

글로벌 산업 생태계의 지평은 이미 전면 재편되었다. 미·중 패권 경쟁과 자국 우선주의가 휘몰아치는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 대한민국 경제의 중추인 반도체 슈퍼사이클을 결코 멈춰 선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삼성전자의 고뇌는 단순한 국내 노사 갈등의 단면이 아니다. 기술 권력의 대이동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어디에 뿌리내릴 것인가에 대한 엄중한 실존적 질문이다. 비록 극적인 타결로 전열을 정비했으나, 천문학적인 보상 규모를 바라보는 주주들의 냉정한 시선과 디바이스경험(DX) 부문 등 사업부 간에 불거진 형평성의 균열은 여전히 우리에게 무거운 과제를 남긴다. 이제 노사는 해묵은 이념 대립과 단기적 실익이라는 좁은 틀을 과감히 탈피해야 한다. 나만 잘살면 된다는 식의 이기적인 사고는 이 격변의 현시대에서 철저히 외면받을 수밖에 없으며, 오직 제 몫 챙기기에만 급급한 이들의 설 자리는 이제 어디에도 없다. 산업사회의 유물인 노동과 자본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으로는 이 거대한 문명적 숙제를 풀 수 없다. 시대가 변했다 대안의 궤적도 변해야 마땅하다.

과거의 낡은 관행을 깨뜨리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는 혁고정신(革故鼎新)의 결단이 참으로 절실한 시점이다. 따라서 노사 협상의 테이블은 단순한 고용 유지를 위한 숫자 놀음이나 일회성 보상의 밀당을 넘어, 노동자가 AI를 도구 삼아 더 높은 차원의 부가가치를 창출하도록 돕는 직무 재정의와 전환 교육을 최우선 의제로 삼아야 한다. 기술의 유연성을 확보하되 노동의 연착륙을 담보할 사회적 안전망을 설계하는 것은, 이 시대 문명국가가 마땅히 짊어져야 할 숭고한 책무다.

우리가 마주한 진짜 숙제는 제도적 상상력의 빈곤을 극복하는 일이다. 노동이 부를 창출하던 시대의 석양이 지고, 기술과 자본이 부를 독식하는 시대의 새벽이 밝았다. 40조 원이라는 거대한 자본의 향방이 보여주듯, AI와 첨단 기술이 창출하는 막대한 부를 어떻게 소유하고 분배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제 생존의 문제다. 소수의 테크 권력이나 특정 주체가 생산 수단과 부를 독점한다면 우리 사회는 극단적 양극화라는 파멸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로봇세, 데이터 배당, 기본소득과 같은 담론은 더 이상 유토피아를 꿈꾸는 공상이 아니다. 인류의 공존과 생존을 위한 가장 현실적이고도 시급한 처방으로서,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논의를 공론장의 중심부로 엄숙하게 끌어올려야 한다.

삼성전자의 이번 타결은 단순한 갈등의 봉합이 아니다. AI 시대에 인간과 기업, 그리고 주주를 포함한 사회적 생태계가 어떻게 상생하고 공존할 수 있는지를 묻는 인류 최초의 시험대다. 우리는 기술의 혜택을 함께 누리는 풍요의 축제로 나아갈 것인가, 아니면 기술의 장막 뒤로 밀려나 소외되는 디스토피아로 추락할 것인가. 인간을 인간답게 증명하는 것은 연산의 속도나 일시적인 숫자의 크기가 아닌, 사유의 깊이와 타자에 대한 공감, 그리고 윤리적 결단이다. 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할 수는 있어도, 이를 대체할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을 지켜내야 한다. 문명 대전환의 골든타임이 흐르고 있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노동계가 지엽적인 갈등과 내부의 반발을 넘어 인간 존엄의 가치를 중심에 둔 숭고한 지혜를 발휘해야 할 때다.

박범철 작가

[ⓒ 로컬(LOCAL)세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