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산을 사랑한 여인 다나카 게이코와 도쿄를 산책하다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1-12-13 17:24:36
▲ 스튜어디스 시절 다나카 게이코.(사진= 다나카 게이코 제공) |
[로컬세계 이승민 특파원]오늘(12일) 도쿄의 하늘은 청명하고 바람은 포근하다. 역도산의 부인 다나카 게이코(田中敬子) 씨와 함께 도쿄 신오쿠보(新大久保) 거리를 산책했다. 한인타운이라 불리는 이 거리는 한국 식당들이 줄지어 있고 걷다보면 한국찻집 떡볶이집 호떡집을 지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설적인 레슬러 역도산(力道山)은 함경도에서 출생하여 조선에서 씨름 일본에서 스모를 거쳐 레슬링으로 입문, 세계 프로레슬링계를 제패한 영웅이다.
게이코는 1963년 일본항공 스튜어디스 시절, 하늘을 날던 비행기 안에서 역도산을 처음 만난다. 역도산이 미국으로 레스링 경기하러 가던 길이었다. 그런 인연은 나이 17년 차를 넘어 서로 사랑했다. 당시 역도산 38세, 게이코 21세였다. 역도산과 사귄지 6개월 만에 약혼을 했고, 약혼해서 6개월 만에 결혼을 했고, 결혼한지 6개월 만에 역도산은 운명을 달리했다. 역도산과 함께 했던 시간은 18개월뿐이었다.
22세에 남편을 잃은 게이코의 뱃속에는 아이가 있었다. 아빠의 얼굴도 모르고 태어난 그 아이는 지금 두 자녀의 어머니가 되어 요코하마에 살고 있다. 게이코가 역도산을 사랑했듯 딸 히로미도 한국을 좋아한다.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는 한국을 찾아가 여행을 하면서 흙을 만져본다고 한다.
▲ 역도산 부인 게이코 여사와 딸 히로미 씨가 한국무용을 관람하기 전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사진= 이승민특파원) |
며칠 전 신주쿠문화회관에서 정애진한국무용공연이 있을 때 나는 이들 역도산 가족을 초대했다. 공연을 감상하던 모녀는 “한국무용은 천상의 춤 같다. 아름다움뿐 아니라 춤사위마다 은은한 생명력이 있다”고 소감을 말했다.
정애진한국무용학원 앞에 다다르자 연락을 받고 나온 한국무용가 정애진 원장이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 한국식당으로 안내했다. 한국요리 뷔페집이었다. 한국무용이야기를 나누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다양한 한국요리를 맛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식사를 마치고 무용학원으로 이동했다.
지하에 위치한 학원에는 장구 괭과리 북 등 한국 악기가 진열 되어 있었고 학생들은 악기를 치거나 무용연습을 하고 있었다. 한국악기와 무용을 체험하고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학원을 나와 다시 신주쿠 가부키쵸(歌舞伎町) 거리를 산책했다.
▲ 게이코 여사와 함께 한인타운으로 불리는 신오쿠보 거리를 걷다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 조선인이던 역도산이 어떻게 일본으로 가게 되었나요?
일제시대에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난 역도산은 소년시절에 씨름으로 천하장사가 되었다. 타고난 재능과 체력을 보고 감동한 일본 경찰 오가타 도라이치(小方寅一)는 아까운 인재라고 여겨 일본 스모협회에 추천해주었다. 당시 역도산의 나이 16세였다.
- 역도산이 일본 국적으로 변경하게 된 이유는?
스모는 일본 국적이 아니면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국적을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역시 오가타 경찰의 도움으로 나가사키현의 모모타(百田) 가문의 양자로 호적을 올려 일본 국적을 얻었다. 본명은 김신락(金信洛)이었지만 어린시절 고향에서 불렸던 광호(光浩)를 넣어 일본이름 모모타 미쓰히로(百田光浩)라고 호적에 올린 것이다.
1940년 스모선수(리키시)가 되면서 역도산(리키도잔)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스모계에서도 주목을 받던 역도산이었지만 요코즈나(천하장사)를 앞에 두고, 레슬링의 매력에 빠져 레슬러로 전향했다.
- 역도산과 사귈 때 부모님의 생각은 어땠는지.
오가타 경찰은 스모선수로 적극 후원해줬다. 아버지도 경찰이었지만 생각이 달랐다. 아버지는 당시 가나가와현 치가사키(茅ケ崎) 경찰서의 경찰서장이었다. 역도산은 조선인이고 레스링은 위험한 직업이라면서 더이상 관계가 깊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아버지를 설득시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 다나카 게이코 여사가 정애진 한국무용학원에 들려 학생들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
- 아버지 얼굴도 못보고 태어난 딸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딸 히로미는 다무라(田村) 가문의 남편을 만나 1남 1녀를 두고 잘 살고 있다. 손녀 에리(えり34)는 아시아나항공 스튜어디스를 하다가 지금은 S기업의 간부가 되어 내년에는 방콕으로 나간다. 손자 케이(圭 32)는 한 때 야구선수로 이름을 알리더니 지금은 스페인으로 유학을 가서 공부 중이다.
- 역도산의 전성기에 수입이 얼마나 되었는지.
역도산은 경기 때마다 4000만엔(약 4억원) 정도 받았다. 당시 보통사람 월급이 1만엔(약 10만원) 할 때 였으니 상상도 못할 높은 수입이었다. 그 밖에도 시부야에 지상 9층 복합 건물을 지어 실내 스케이트장, 사격장, 당구장, 볼링장, 복싱장 등 종합 스포츠 시설을 운영했고, 아카사카에는 고급 아파트 리키맨션을 건축하여 분양했다.
대규모 토지를 매입하여 골프장 건설, 리조트 건설, 자동차 경주장 등 규모가 큰 사업을 진행했고, 레스토랑이나 나이트클럽 사업까지 광범위하게 사업을 별여 활약했다.
- 생말고기(말사시미) 풍습이 역도산으로 인해 생겼다고 들었는데?
1955년 프로레스링이 흥행할 무렵, 역도산이 후쿠시마현(福島県) 아이즈와카마츠시 (福島県会津若松市)를 방문했다. 그 때 나나카마치(七日町)의 정육점에서 생말고기를 주문하여, 가져간 고추장에 찍어서 그 자리에서 먹었다. 이 현장이 전국 뉴스로 나가자 재밌는 화제거리가 되었다. 후쿠시마현 아이즈 지방에는 본래 생말고기는 먹지 않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생말고기(馬刺し)를 고추장에 찍어먹는 풍습이 생겨났다.
- 역도산의 제자들은?
비록 길지 않은 삶을 살았지만 ‘김일’,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 등 레슬링계의 별 같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한국 민요를 즐겨 불렀던 역도산이었지만 지금도 '정의의 상징', '불사신의 영웅', ’프로레스링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다.
- 꽃 같은 나이 22살에 남편을 잃었다. 재혼 생각은 없었는지?
내가 재혼하면 한 영웅의 역사에 흠이 된다고 생각했다. 역도산을 사랑했던 여인으로써 한일간 다리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한일 양국의 우정과 친선을 위해 봉사하면서 살다보니 어느새 나이 80이 되었다.
오늘은 영웅이야기를 들으며 일본인 열녀와 함께 산책했다. 남편의 나라 한국을 그리며 순결하게 살아온 게이코, 아직도 살아있어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게이코, 고귀하고 숭고한 한 여자의 일생이라는 말로 마무리하기엔 아쉬운 여운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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