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산책 ⑥] 우에노(上野)와 아메요코, 서민의 활기와 예술의 향기가 교차하는 곳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4-16 17:49:23

우에노 온시 공원
지성의 향연과 백제의 숨결
사이고 다카모리와 ‘동북의 현관’
도심 속 연꽃 바다와 벤텐도
아메요코의 기원
왁자지껄한 호객 소리의 향연
우에노 공원과 아메요코 시장. 왼쪽은 고즈넉한 사색의 공간 우에노 공원, 전통 사찰 벤텐도 인근 풍경과 시노바즈 호수의 연잎 바다, 오른쪽은 요동치는 생명력, 아메요코 시장. 사진 이승민 기자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간다가 에도의 기개와 장인 정신을 간직한 곳이었다면, 발걸음을 조금 더 동북쪽으로 옮겨 마주하는 우에노(上野)는 도쿄에서 가장 다층적인 얼굴을 가진 동네다. 거대한 공원 안에 예술과 학문의 전당이 위엄 있게 자리 잡고 있는 한편, 언덕 아래에는 사람 냄새 물씬 풍기는 재래시장이 쉼 없이 맥박친다.

1. 에도의 수호 사찰에서 일본 최초의 공원, 우에노 온시 공원

우에노 산책의 시작은 단연 우에노 온시 공원(上野恩賜公園)이다. 본래 이곳은 에도 막부를 수호하며 도쿠가와 가문의 위세를 떨치던 거대 사찰 ‘간에이지(寛永寺)’의 경내였다. 1868년 에도 막부의 종말을 고한 보신 전쟁의 격전지가 되며 사찰 대부분이 소실되는 아픔을 겪었으나, 1873년 일본 최초의 공원으로 지정되며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공원 이름에 붙은 ‘온시(恩賜)’는 황실로부터 하사받았다는 뜻으로, 그만큼 이 땅이 도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남다름을 상징한다.

2. 지성의 향연과 백제의 숨결: 문화의 숲

우에노는 명실상부한 일본 예술과 학문의 심장부다. 공원 내에는 세계적인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국립서양미술관(세계문화유산)을 비롯해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도쿄 국립박물관, 국립과학박물관, 도쿄도 미술관 등이 밀집해 있다. 근대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변치 않는 고즈넉함을 간직한 이 ‘문화의 숲’ 곳곳에는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문화적 토양을 다졌던 일본 근대의 열망이 고스란히 응축되어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근대 지성의 상징들 한편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역사의 흔적이 고요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백제의 왕인(王仁) 박사 기념비다. 5세기 초, 일본 응신 천황의 초대로 건너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며 일본 고대 문화의 기틀을 닦은 왕인 박사는 이곳에서 ‘지혜의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다. 1940년 세워진 이 비석은 도심 한복판에서 1,600년 전 백제의 지성이 일본에 끼친 영향을 묵묵히 증언한다. 서구식 근대 건축물들 사이에서 마주하는 백제의 흔적은, 도쿄의 문화적 뿌리가 바다 건너 우리와 얼마나 깊게 맞닿아 있는지를 새삼 일깨워준다.

3. 사이고 다카모리와 ‘동북의 현관’ 우에노역

공원 입구 언덕 위에는 개의 목줄을 쥔 채 먼 곳을 응시하는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의 동상이 서 있다. 근대 일본의 기틀을 닦은 영웅이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그의 동상은 우에노의 상징과도 같다. 동상 아래로 눈을 돌리면 거대한 우에노역이 보인다. 과거 도호쿠(東北) 지방과 도쿄를 잇는 열차가 출발하던 이곳은, 고향을 떠나 상경한 수많은 젊은이에게 ‘희망과 눈물의 정거장’이었다. 지금은 현대식 역사로 변모했지만, 여전히 주변에는 북쪽 지방 사람들의 투박한 정서가 서린 노포들이 남아 향수를 자극한다.

4. 시노바즈노이케: 도심 속 연꽃 바다와 벤텐도

우에노 공원의 남쪽 끝에는 거대한 천연 연못인 시노바즈노이케(不忍池)가 있다. 연못 중앙의 섬에는 팔각형 모양의 벤텐도(弁天堂)가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교토의 비와호를 모티브로 조성된 에도 시대의 풍류가 서린 곳이다. 여름철, 사람 키만큼 자란 연잎들이 연못 전체를 초록빛 바다로 만들고 그 사이로 분홍빛 연꽃이 고개를 내밀 때면 도심의 소음은 어느덧 사라지고 정토(淨土)에 발을 들인 듯한 신비로운 평온함이 찾아온다.

우에노는 과거와 현재, 예술과 일상, 세련됨과 투박함이 한데 섞인 도쿄의 민낯이다. 박물관에서 고요한 사색에 잠겼다가 언덕을 내려와 마주하는 왁자지껄한 아메요코 시장으로의 전이는, 도쿄 산책자가 누릴 수 있는 가장 극적인 대비이자 즐거움이다. 예술의 향기와 고대 백제의 숨결이 가득한 우에노의 숲을 뒤로하고, 이제 전후의 생명력이 뜨겁게 요동치는 철길 아래 아메요코(アメ横) 시장의 활기 속으로 몸을 던져본다.

아메요코(アメ横), 철길 아래 요동치는 도쿄의 뜨거운 민낯

우에노 공원의 고요한 사색에서 벗어나 육중한 전철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드레일 아래로 발을 들이면, 도쿄에서 가장 생명력 넘치는 풍경이 펼쳐진다. 바로 아메요코 시장(アメ横商店街)이다. 세련된 긴자나 화려한 시부야와는 전혀 다른, 투박하고도 정겨운 도쿄의 속살이 이곳에 있다.

1. 전후의 척박함을 이겨낸 생존의 이름: 아메요코의 기원

아메요코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흥미로운 역사가 서려 있다. 첫 번째는 전후 식량난 시절, 설탕이 귀해지자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사탕(아메, 飴)을 팔던 가게들이 모여들었다는 설이다. 두 번째는 미국(아메리카) 군수물자와 구호물자를 사고팔던 암시장이었다는 설이다. 어느 쪽이든 아메요코는 폐허 속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서민들의 절박함과 강인한 생명력이 빚어낸 공간이다. 1940년대 중반, 굶주린 이들의 배를 채워주던 그 암시장은 이제 매일 수만 명이 오가는 도쿄 최대의 재래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2. "자, 덤이오!" – 왁자지껄한 호객 소리의 향연

아메요코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귀를 때리는 것은 상인들의 우렁찬 호객 소리다. 특히 초콜릿이나 과자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더 넣어! 하나 더!"를 외치며 덤을 얹어주는 **'시무라 쇼텐(志村商店)'**의 풍경은 아메요코의 명물이다. 투박한 나무 상자 위에 가득 쌓인 수산물과 견과류, 건어물 사이로 상인들과 손님이 나누는 흥정 소리는 디지털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 사이의 정'을 일깨워준다. 규격화된 마트의 바코드 대신, 눈대중과 손끝에서 결정되는 덤의 미학이 이곳에는 여전히 살아있다.

3. 고가 아래의 낭만: 센베로와 다국적 미식

아메요코를 완성하는 풍경 중 하나는 전철 고가 아래 촘촘히 박힌 노포들이다. 머리 위로 전철이 지나갈 때마다 천장이 덜컹거리고 대화가 끊기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맥주잔을 기울인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모츠야키(내장구이)나 소바집뿐만 아니라, 중국의 양꼬치, 동남아시아의 향신료 요리, 한국의 호떡 등 다국적 미식 거리가 형성되어 도쿄 속의 작은 지구촌을 연상케 한다. 1,000엔으로 가볍게 취할 수 있는 '센베로(せんべろ)' 주점에 앉아 낡은 철길의 진동을 느끼다 보면, 도심의 외로움은 어느덧 연기와 함께 사라진다.

4. 멈추지 않는 시장의 심장: 과거와 미래의 공존

아메요코는 멈춰있는 과거가 아니다. 오래된 구제 의류 점포 옆에 최첨단 운동화 멀티숍이 들어서고, 할머니가 운영하는 건어물 가게 앞에 젊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줄을 서서 탕후루를 먹는다. 최근 현대화의 바람 속에서도 아메요코가 그 정체성을 잃지 않는 이유는, 이곳이 단순히 물건을 파는 곳이 아니라 '도쿄인의 삶' 그 자체를 파는 곳이기 때문이다. 70여 년 전 암시장에서 시작된 그 거친 숨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붉은색 간판 아래에서 뜨겁게 요동치고 있다.

우에노 온시 공원이 도쿄의 고귀한 정신을 담은 '머리'라면, 아메요코는 쉼 없이 피를 공급하는 '심장'이다. 예술의 숲에서 얻은 영감을 안고 시장통의 북적거림 속에 몸을 섞는 이 경험은, 도쿄라는 도시의 입체적인 매력을 완성하는 마지막 퍼즐 조각과도 같다. 서민들의 활기가 가득한 철길 아래를 뒤로하고, 이제 도쿄의 가장 세련된 변신이자 옛 기억의 재해석이 일어나는 다음 목적지로 향한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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