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문윤국③] 남강 이승훈과의 운명적 만남, 평양신학교 입학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4-11 07:54:33
오산학교, 독립운동의 요람을 일구다
교육이 망국의 사슬을 끊으리라
더 깊은 진리를 향하여 평양신학교로의 길
길선주 목사와의 운명적 만남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주역이 되다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20세기 초, 정주의 하늘은 서구의 신문물과 전통의 가치관이 교차하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청년 문윤국이 성경 속에서 '평등'과 '자유'라는 혁명적 가치를 발견하며 고뇌하던 무렵,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민족의 운명을 바꿀 하나의 거대한 산맥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오산학교의 설립자, 남강(南岡) 이승훈과의 만남이었다.
정주의 두 거인, 운명처럼 마주하다
1907년경, 정주에는 이미 개화의 바람이 매섭게 불고 있었다. 안창호의 연설에 감명받아 상투를 자르고 전 재산을 털어 학교를 세우려던 남강 이승훈에게, 남평 문씨 가문의 촉망받는 지식인이자 개신교라는 새로운 사상에 눈을 뜬 문윤국은 놓칠 수 없는 동지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정주읍의 한 조용한 사랑채에서 이루어졌다. 상인 출신의 실천가 이승훈과 유학적 근본 위에 신학적 열망을 더한 선비 문윤국. 신분과 배경은 달랐지만, 도탄에 빠진 조국을 구해야 한다는 열망만은 하나였다. 남강이 문윤국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윤국 형, 나라가 망해가는 것은 무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배운 사람이 없어서요. 저들이 총칼로 우리를 억누를 때, 우리는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스스로 일어설 힘을 길러줘야 하오."
문윤국은 전율했다. 가문의 가르침이었던 '민초를 향한 긍휼'이 남강의 입을 통해 '민족 교육'이라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 구체화되는 순간이었다.
오산학교, 독립운동의 요람을 일구다
문윤국은 이승훈과 뜻을 같이하며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기틀을 다지는 데 헌신했다. 그는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를 넘어, 학생들에게 민족의 혼을 불어넣는 정신적 지주였다. 당시 오산학교는 일제의 감시가 가장 삼엄한 곳이었으나, 문윤국은 유교의 절개와 기독교의 희생정신을 빌려 저항의 논리를 설파했다.
"글을 배우는 것은 나를 세우는 것이요, 나를 세우는 것은 나라를 되찾는 첫걸음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조선의 역사와 지리를 가르치며 우리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게 했다. 훗날 고당 조만식, 춘원 이광수 등 한국 현대사를 수놓을 인물들이 이곳에서 그와 교류하며 영감을 얻었다.
그에게 교육은 단순히 문맹을 퇴치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제가 박탈한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는 성스러운 의식이었다.
교육이 망국의 사슬을 끊으리라
문윤국은 학교 운영과 선교 활동에 가산(家産)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남평 문씨 가문의 넉넉했던 살림은 점점 기울어갔으나, 그의 눈빛은 오히려 더욱 맑아졌다. 그는 문중의 우려 섞인 목소리에 이렇게 답했다.
"집안의 기둥이 썩는 것은 고칠 수 있으나, 나라의 기둥인 청년들이 썩는 것은 구제할 길이 없습니다. 내 자식에게 땅을 물려주기보다,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정신을 물려주는 것이 선비의 도리입니다."
이 시기 문윤국과 이승훈의 교류는 단순한 동료애를 넘어선 것이었다. 이들은 정주의 들판을 걸으며 훗날 3.1 운동의 도화선이 될 민족 대단결의 청사진을 그려나갔다.
더 깊은 진리를 향하여 평양신학교로의 길
1900년대 초반,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릴 만큼 거대한 영적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유교적 합리주의와 선비의 기개를 체득한 청년 문윤국이 평양신학교로 향한 것은 단순한 학문적 호기심이 아니었다. 풍전등화의 국운 앞에서 ‘민족의 영혼’을 먼저 깨워야 한다는 시대적 소명이 그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오산학교에서 교육 구국 운동의 선봉에 섰던 문윤국은 지식의 전달만으로는 부족함을 절감했다. 민족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일깨울 '영적 각성'의 필요성을 통감한 것이다. 그는 교육자로서의 소명을 넘어 더 깊은 신학적 토대를 쌓고자 평양행을 결심한다. 유학자의 붓을 놓고 민족의 목자가 되기로 한 이 선택은, 훗날 그가 3.1 운동의 정주 지역 주동자로서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정주의 들판을 가로질러 평양으로 향하는 그의 봇짐 속에는 낡은 성경 한 권과 오산학교 제자들의 맑은 눈망울이 담겨 있었다. 거목의 가지가 신앙의 대지에 깊은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길선주 목사와의 운명적 만남
문윤국이 평양에 발을 딛었을 때, 도시는 여전히 평양 대부흥운동의 뜨거운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곳에서 조선 개신교의 상징이자 영적 지도자였던 길선주(吉善宙) 목사를 만난다. 길선주는 본래 도교에 심취했던 인물이었으나 기독교로 회심하여 민족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 운동을 이끌던 거인이었다.
문윤국은 길선주 목사의 설교에서 강렬한 영적 충격을 받았다. 유교가 ‘수신제가(修身齊家)’를 통해 외부의 질서를 바로잡는 길이라면, 길선주가 외치는 복음은 인간 내면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윤국 형, 나라를 잃은 것은 껍데기를 잃은 것이나, 신념을 잃는 것은 알맹이를 잃는 것이오. 우리가 먼저 하늘 앞에 무릎 꿇어야 이 땅의 백성들이 당당히 일어설 수 있소.”
길선주의 이 한마디는 문윤국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는 정주의 선비라는 자부심을 내려놓고, 평양의 차디찬 장대현교회 바닥에서 밤을 지새우며 민족의 고난을 짊어질 ‘영적 투사’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문윤국에게 복음이 단순한 종교가 아닌, 망국의 한을 품은 민족을 다시 살려낼 ‘생명의 동력’임을 깨닫게 했다.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주역이 되다
문윤국은 1907년 한반도를 뒤흔든 평양 대부흥운동의 한복판에 있었다. 수천 명의 인파가 모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통곡하는 그 현장에서, 문윤국은 개인의 구원을 넘어선 ‘민족적 각성’을 목격했다.
그들은 교회가 단순히 내세의 복을 비는 곳이 아니라, 민족의 아픔을 치유하고 독립의 에너지를 결집하는 '성소(聖所)'가 되어야 한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1세대 목회자들과 닦은 ‘구국 신앙’의 기틀
평양신학교에서의 시간은 혹독하면서도 성스러웠다. 문윤국은 이곳에서 이기풍, 김선두 등 훗날 한국 교계와 독립운동사를 수놓을 동지들과 함께 수학했다.
그에게 신학은 관념이 아니었다. 유교에서 배운 선비의 ‘절개’를 기독교의 ‘희생’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이었다.
양반과 상놈의 구분을 엄격히 하던 시대에, "하나님 아래 모든 인간은 형제"라는 선언은 그에게 일제의 압제에 항거할 가장 강력한 사상적 무기가 되었다.
그는 성경 속 출애굽기(Exodus)를 읽으며 압제받는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을 조선의 현실과 겹쳐 보았다. "조선도 반드시 해방의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한다"는 신념이 이때 굳어졌다.
1918년 제11회 졸업, 목자가 되어 정주로 돌아오다
고된 수행 끝에 문윤국은 1918년 평양신학교를 제11회로 졸업한다. 그는 화려한 예우를 받는 대형 교회의 청빙을 뒤로하고, 다시 고향 정주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사서삼경 대신 낡은 성경책이 들려 있었고, 가슴속에는 평양에서 얻은 불꽃 같은 성령의 체험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정주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한 그는 이제 단순히 글을 가르치는 훈장이 아니었다. 낮은 곳에서 병든 자를 돌보고, 억눌린 자들에게 자유의 가치를 설파하는 '민족의 목자'였다.
거사를 앞둔 영적 무장
평양신학교에서 다진 신앙적 기초는 훗날 그가 3.1 운동의 정주 지역 주동자로서 일제의 모진 고문을 견뎌낼 수 있게 한 버팀목이 되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은 평양의 찬 바람 속에서 나눈 기도와 영적 각성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오산학교에서 기른 청년들의 기개와 평양에서 얻은 영적 결단이 만나, 마침내 1919년 기미년의 봄을 향해 거대한 폭발을 준비하고 있었다.
– 계속 -
【企画連載:独立運動家 文潤国 ③】南江・李昇薫との運命的な出会い、平壌神学校への入学
【ローカル世界=李勝敏 記者】 20世紀初頭、定州の空は西欧の新文化と伝統的な価値観が交錯し、巨大な渦を巻き起こしていた。青年・文潤国が聖書の中に「平等」と「自由」という革命的な価値を発見して懊悩していたころ、彼の人生のみならず民族の運命をも変える一つの巨大な山脈が近づいていた。のちに五山学校を設立する南江・李昇薫との出会いである。
定州の二大巨頭、運命のごとく対峙する
1907年ごろ、定州にはすでに開化の嵐が猛烈に吹き荒れていた。島山・安昌浩の演説に感銘を受けて断髪し、全財産を投じて学校を設立しようとしていた南江・李昇薫にとって、南平文氏の家門が誇る嘱望される知識人であり、プロテスタントという新たな思想に目を開いた文潤国は、決して逃してはならない同志であった。
二人の出会いは、定州邑のある静かな客間で実現した。商人出身の実践家である李昇薫と、儒学的な根根幹の上に神学的な熱望を注ぎ込んだ文士の文潤国。身分や背景は異なっていたが、塗炭の苦しみにある祖国を救わねばならないという熱望だけは一つであった。南江は文潤国の)手を握り、次のように語った。
「潤国兄、国が滅びゆくのは武器がないからではなく、学ぶ者がいないからです。彼らが銃剣で我々を抑圧するとき、我々は子供たちに文字を教え、自ら立ち上がる力を育ててあげねばなりません」
文潤国は心震わせた。家門の教えであった「民草への慈悲」が、南江の口を通じて「民族教育」という具体的な実践方案として具現化された瞬間であった。
五山学校、独立運動の揺籃を築く
文潤国は李昇薫と志を同じくし、五山学校の基盤を固めることに献身した。彼は単に知識を伝達する教師の枠を超え、学生たちに民族の魂を吹き込む精神的な支柱であった。当時、五山学校は日帝の監視が最も厳重な場所であったが、文潤国は儒教の節義とキリスト教の犠牲精神をもって抵抗の論理を説いた。
「書を学ぶことは己を確立することであり、己を確立することは国を取り戻す第一歩である」
彼は学生たちに朝鮮の歴史と地理を教え、我々が誰であるかを忘れないようにした。のちに古堂・曹晩植や春園・李光洙など、韓国現代史を彩る人物たちがこの地で彼と交流し、インスピレーションを得た。彼にとって教育とは、単に文盲を退治する手段ではなかった。それは日帝によって剥奪された「民族の自矜心」を取り戻す神聖なる儀式であった。
教育が亡国の鎖を断ち切らん
文潤国は学校の運営と宣教活動に、自らの家産を惜しみなく注ぎ込んだ。南平文氏の裕福であった暮らし向きは次第に傾いていったが、彼の眼差しはむしろ輝きを増した。彼は門中の懸念の声を前に、こう答えたという。
「家門の柱が腐ることは直せますが、国の柱である青年たちが腐ることは救済の道がありません。我が子に土地を遺すより、この地の若者たちに精神を遺すことこそが文士の道です」
この時期の文潤国と李昇薫の交流は、単なる同僚愛を超越したものであった。彼らは定州の野原を歩みながら、のちに三・一運動の導火線となる民族大団結の青写真を描いていった。
さらなる真理へ、平壌神学校への道
1900年代初頭、平壌は「東洋のエルサレム」と呼ばれるほど、巨大な霊的変革の渦中にあった。儒教的合理主義と文士の気概を体得した青年・文潤国が平壌神学校へと向かったのは、単なる学問的好奇心からではなかった。風前の灯火にある国運を前に、「民族の魂」をまず目覚めさせねばならないという時代的使命が彼を突き動かしたからである。
五山学校で教育救国運動の先鋒に立った文潤国は、知識の伝達だけでは不十分であることを痛感していた。民族の精神を根本から呼び覚ます「霊的覚醒」の必要性を痛感したのである。彼は教育者としての使命を超え、より深い神学的土台を築くべく平壌行きを決意する。儒学者の筆を置き、民族の牧者となることを選んだこの決断は、のちに彼が三・一運動の定州地域における主導者として十字架を背負う決定的な契機となった。
定州の野原を横切り平壌へと向かう彼の行李の中には、一冊の古びた聖書と五山学校の弟子たちの澄んだ瞳が詰まっていた。巨木の枝が信仰の大地に深い根を下ろし始めた、歴史的な瞬間であった。
吉善宙牧師との運命的な出会い
文潤国が平壌に足を踏み入れたとき、都市にはいまだ平壌大リバイバル運動(大興起運動)の熱気が立ち込めていた。そこで彼は、朝鮮プロテスタントの象徴であり霊的指導者であった吉善宙牧師と出会う。吉善宙はもともと道教に傾倒していた人物であったが、キリスト教へと回心し、民族の罪を自白して悔い改め運動を牽引していた巨頭であった。
文潤国は吉善宙牧師の説教から強烈な霊的衝撃を受けた。儒教が「修身斉家」を通じて外部の秩序を正す道であるならば、吉善宙が叫ぶ福音は、人間の内面の根本的な変革を要求するものであった。
「潤国兄、国を失うことは外皮を失うことですが、信念を失うことは中身を失うことです。我々がまず天の前に膝を屈してこそ、この地の民衆が堂々と立ち上が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吉善宙のこの一言は、文潤国の胸に火をつけた。彼は定州の文士という自負心を捨て、平壌の冷え切った章台峴教会の床で夜を徹しながら、民族の苦難を背負う「霊的闘士」へと生まれ変わり始めた。福音とは単なる宗教ではなく、亡国の恨を抱いた民族を再び蘇らせる「生命の原動力」であることを、彼は悟ったのである。
1907年、平壌大リバイバル運動の主役となる
文潤国は、1907年に韓半島を揺るがした平壌大リバイバル運動の渦中にいた。数千人の群衆が集まり、自らの罪を告白して慟哭するその現場で、文潤国は個人の救いを超えた「民族的覚醒」を目撃した。彼らは、教会が単に現世利益を祈願する場所ではなく、民族の痛みを癒やし、独立のエネルギーを結集する「聖所」にならねばならないという点で一致した。
第一世代の牧会者たちと築いた「救国信仰」の礎
平壌神学校での時間は、過酷でありながらも神聖なものであった。文潤国はここで、李基豊や金船頭など、のちに韓国教会界と独立運動史を彩る同志たちとともに神学を修めた。
彼にとって神学は観念ではなかった。儒教で学んだ文士の「節義」を、キリスト教の「犠牲」へと昇華させる過程であった。両班と常民の区別が厳格であった時代において、「神の下、すべての人間は兄弟である」という宣言は、日帝の圧政に抗う最も強力な思想的武器となった。彼は聖書の中のエクソダス(出エジプト記)を読みながら、抑圧されるイスラエル民族の苦痛を朝鮮の現実と重ね合わせた。「朝鮮も必ずや解放のカナンへと進まねばならない」という信念は、このときに確立された。
1918年、第11回卒業。牧者となって定州へ帰還する
過酷な修行の末、文潤国は1918年に平壌神学校を第11回生として卒業する。彼は華やかな待遇を受ける大教会からの招聘を辞退し、再び故郷の定州へと向かった。彼の手には四書三経の代わりに古びた聖書が握られており、胸中には平壌で得た炎のごとき聖霊の体験がたぎっていた。
定州教会の担任牧師として赴任した彼は、もはや単に文字を教える訓長ではなかった。低い場所で病める者を世話し、抑圧された者たちに自由の価値を説く「民族の牧者)」であった。
挙事を控えた霊的武装
平壌神学校で培った信仰の基礎は、のちに彼が三・一運動の定州地域における主導者として、日帝の過酷な拷問に耐え抜くための支えとなった。死を恐れない大胆さは、平壌の冷たい風の中で交わした祈りと霊的覚醒に由来するものであった。
いまや、すべての準備は整った。五山学校で育てた青年たちの気概と、平壌で得た霊的決断が出会い、ついに1919年、己未年の春に向けて巨大な爆発の時を待っていた。
(つづ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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