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더미 속 무궁화 살린 80세 재일교포… 日 경찰도 감동했다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9-21 07:58:17

- 도쿄 거주 작가 문시운 씨, 방치된 빈집서 부엌칼로 무궁화 구출
- 절도 오인으로 긴급 체포… "내 조국의 꽃" 진심 어린 호소에 훈방
- 아카바네경찰서장 "진정한 애국심 배워야"… 나무는 경찰서 화단에 심기로
일본 도쿄의 길가에 핀 무궁화. 사진 = 이승민 특파원.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쓰레기더미에 파묻힌 채 버려진 무궁화를 구하기 위해 직접 부엌칼을 들고 나섰다가 절도범으로 오인받았던 80대 재일한국인 작가의 사연이 뒤늦게 알려져 잔잔한 감동을 주고 있다.

사건은 지난 9월 17일, 도쿄 기타구 아카바네에서 발생했다. 현지에 거주하는 재일한국인 작가 문시운(80) 씨는 마을을 산책하던 중 인근 빈집 화단에 생활 쓰레기가 무단 투기된 광경을 목격했다.

담장 너머 방치된 화단에는 온갖 생활 쓰레기가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일본 사회에서 이런 광경은 낯설고도 씁쓸한 일이었다.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혀를 차며 무심코 쓰레기더미를 헤치던 그의 시선에, 순간 믿을 수 없는 형상이 들어왔다.

무궁화였다.

오물과 잡동사니에 짓눌려 숨조차 쉬기 버거워 보이는 낯익은 잎사귀. 이역만리 타향의 더러운 쓰레기 속에서 신음하듯 고개를 떨구고 있는 조국의 꽃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았다. 평생을 재일한국인으로 살며 마음에 품어온 고국의 상징이 이토록 처참하게 버려져 있는 꼴을, 팔순의 노인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문 씨는 황급히 집으로 내달렸다. 변변한 삽 한 자루 없었기에 손에 쥐이는 대로 부엌칼 하나를 움켜쥐고 다시 빈집으로 돌아왔다. 굳어버린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무뎌진 칼날로 흙을 파내고 질긴 잔뿌리를 조심스레 베어냈다. 1미터가 훌쩍 넘는 나무를 온전히 살려내기 위해 땀을 비 오듯 쏟으며 씨름하기를 한 시간. 마침내 흙투성이가 된 무궁화가 그의 품으로 뽑혀 나왔다.

자신의 집마당에 숨겨둘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 입구 양지바른 화단에 심어, 오가는 사람 모두가 이 고운 꽃을 바라보며 생명을 느낄 수 있게 할 참이었다. 노구의 몸으로 커다란 나무를 질질 끌며 집으로 향하던 길, 그의 손에는 나무와 흙 묻은 부엌칼이 들려 있었고 이마에는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때,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경찰차 두 대가 비명처럼 멈춰 섰다. 차 문이 열리며 건장한 순경 다섯 명이 순식간에 문 씨를 에워쌌다. 한 손에 식칼을 쥐고 다른 손으로 거대한 나무를 끌고 가는 팔순 노인의 모습은 영락없는 범죄 현장의 용의자였다.

"어디서 이 나무를 캐어 오는 길입니까?"

다급하고 위압적인 경찰의 질문에 숨을 몰아쉬며 상황을 설명했으나, 법의 잣대는 냉정했다.

"주인의 허락도 없이 남의 집 정원수를 파내는 것은 명백한 절도 행위입니다. 일단 서까지 가셔서 경위서를 작성하셔야겠습니다."

결국 문 씨는 경찰차 뒷좌석에 올랐고, 쓰레기통에서 구출해 낸 무궁화 나무와 흙 묻은 부엌칼은 '압수된 증거물'이 되어 아카바네 경찰서로 실려 갔다.

조사실의 차가운 공기 속에서 경찰들이 사건의 경위를 캐물었을 때, 문 씨는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진심을 또박또박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 나무는 무궁화입니다. 대한민국의 국화이며, 나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타국 땅에서 쓰레기더미에 파묻혀 질식해 가는 내 나라의 꽃을 보고 어떻게 그냥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내 사리사욕으로 집에 가져가려던 것이 아닙니다. 불쌍한 나무를 햇볕 좋은 화단에 심어 물과 거름을 주고, 지나가는 모든 이에게 아름답게 꽃피워 보여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노인의 목소리에는 눈물겨운 진정성이 배어 있었다. 그는 조용히 경찰들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만약 입장을 바꾸어 봅시다. 여러분이 한국 땅에 살고 있는데, 일본의 상징인 벚나무가 쓰레기통 속에 처참하게 버려져 썩어가고 있다면, 당신들은 과연 모른 척 지나갈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구해서 살려내려 하겠습니까?"

조사실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경찰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노인의 눈빛에 서린 결연함과 순수한 애정에 말문이 막힌 듯했다. 한 경찰관이 노인의 진술을 꼼꼼히 적은 조서를 들고 서장실로 향했다.

잠시 후, 보고를 받은 서장이 조사실로 걸어 나왔다. 서류를 찬찬히 훑어본 서장은 문 씨와 부하 경찰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뜻밖의 말을 건넸다.

"이 한국인 어르신은 참된 애국자입니다. 우리 경찰 중에 과연 이런 처지가 되었을 때 조국을 위해 이토록 용기 있게 행동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란 바로 이런 것이며, 이는 우리 모두가 배워야 할 정신입니다. 이분을 결코 죄인으로 대하지 말고, 정중하게 댁까지 모셔다드리세요."

험악했던 조사실의 공기가 봄눈 녹듯 부드럽게 풀려나갔다. 오해가 풀리고 무사히 풀려나게 된 문 씨는 서장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한구석에 놓인 무궁화를 바라보며 간곡한 당부를 남겼다.

"어찌 되었든 귀한 생명을 캐내어 왔으니, 그냥 말라 죽게 둬서는 안 됩니다. 부디 이 경찰서 앞마당 화단에 심어서 정성껏 키워주십시오."

경찰들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염려 마십시오. 경찰서 화단 가장 중심에 정성껏 심어 잘 가꾸겠습니다."

쓰레기더미 속에서 칼 한 자루로 시작되었던 팔순 노인의 절박했던 구출 작전은, 경찰서 앞마당에 새 생명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경찰차 대신 배려 깊은 순경의 승용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문 씨의 창밖으로, 맑게 갠 도쿄의 가을 하늘이 한없이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국경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참된 애국의 온기가 그곳에 오롯이 머물러 있었다.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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