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수오지심(羞惡之心) 잃은 권력, 직언(直言) 잃은 사회

로컬세계

local@localsegye.co.kr | 2026-03-07 09:07:24

방조라는 이름이 빚어낸 시대적 붕괴 박범철 작가

우리가 마주한 사회의 윤리적 근간이 위태로울 정도로 붕괴했다. 입법부와 관공서, 재계와 종교계에 이르기까지, 권력을 거머쥔 일부 인사들의 몰상식한 언행은 이제 더 이상 우발적인 일탈이라 부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카메라 앞의 책임자는 고개를 숙이면서도 끝내 퇴진을 거부하고, 밀실의 회의장에서는 명백한 과오를 마주하고도 일부의 방조 아래 누구 하나 자성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공동체의 신뢰를 갉아먹으며 시민들에게 깊은 자괴감을 안기는 이 일련의 풍경은 가히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지경이다. 

시대의 이정표가 되어야 할 리더들이 도리어 사회의 불안 요소로 전락한 현실은, 이제 아이러니를 넘어 일상이 된 참상이다. 절제를 잃고 남용되는 권력은 필연적으로 부패로 기운다. 그 몰락의 출발점은 리더 개인의 빈약한 소양과 마비된 판단력, 제어되지 않는 탐욕이다. 참담한 것은 이 타락의 끝에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국가의 노력이 너무나도 적다는 사실이다. 잘못이 분명함에도 회의는 조용히 끝나고, 문제 제기는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말로 묻힌다. 내부에서 나온 고언은 조직의 안정을 해친다는 이유로 불온시되고, 말하는 이는 점차 배제된다. 그렇게 직언(直言)이 사라진 자리를 기만적인 침묵이 채운다.

그 침묵은 단순한 방관이 아니다. 댓글창에서, 술자리에서, 사석에서는 분노하면서도 막상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등을 돌리는 선택적 침묵이다. 그래도 우리 편인데, 저쪽이 더 문제인데라는 진영 논리가 도덕 판단을 대신하는 순간 사회는 스스로 비판 능력을 거세한다.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체념과 나서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타협 속에서 권력자는 점점 더 대담해지고 거짓과 궤변은 일상이 된다.

이제 질문은 우리 자신을 향해야 한다. 왜 이 사회는 이토록 탁해졌는가. 혹시 우리는 이 뻔뻔한 연극을 가능하게 만든 관객이자 공모자는 아니었는가. 리더의 타락은 결코 진공 상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의 오만과 우리의 방조가 결탁해 빚어낸 합작품이다. 내부 비판을 갈등으로 치부하며 외면했고, 직언하는 이들이 고립될 때 우리는 침묵으로 그들을 벼랑 끝으로 밀어내지 않았는가. 우리가 스스로 낮춘 도덕의 기준이 결국 괴물을 키워낸 셈이다.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는 사회는 이미 도덕적 토대가 붕괴된 사회다. 리더가 거리낌 없이 거짓을 발설할 수 있는 배경에는 대중의 선택적 분노와 습관화된 방관이 있다. 기자의 질문이 사라진 브리핑, 반대 의견 없는 회의, 박수만 남은 집회는 권력의 타락을 가속하는 장치다. 우리 모두가 이 시대적 퇴행의 공범이라는 뼈아픈 자각 없이는 어떤 근본적 변화도 기대할 수 없다.

리더에게는 자신의 과오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수오지심(羞惡之心)이 절실하다. 동시에 사회에는 그 부끄러움을 끝까지 묻고 확인하는 집요함이 필요하다. 직언이 사라진 자리에 기만이 똬리를 틀고, 그 기만이 상식을 조롱하는 사회에 미래는 없다. 권력 앞에서 질문하는 목소리가 불편함으로 취급되는 순간 공동체는 이미 병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주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리더는 무치(無恥)한 권력이 초래하는 파국을 직시하고, 고언 앞에 겸허히 머리를 숙일 줄 알아야 한다. 

대중 또한 침묵의 안락함이라는 비겁한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 진영의 벽을 넘어 잘못을 잘못이라 말할 수 있는 개인의 용기를 복원해야 한다. 회의실에서, 투표소에서, 일상의 대화 속에서 거짓이 이득이 되는 구조를 무너뜨릴 서늘한 감시의 시선을 다시 세워야 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이 회복되고 그 마음들이 모여 침묵의 벽을 허물 때 사회의 상처는 비로소 아물기 시작할 것이다. 직언이 살아 숨 쉬는 건강한 공동체는 리더의 각성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감내해야 할 정의로운 불편함 위에서만 바로 설 수 있다.

박범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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