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용수의 팍스코리아나]유엔과 세계 평화의 한계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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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cal@localsegye.co.kr | 2015-12-21 09:51:44

▲설용수 이사장.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후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민주주의가 발전해 갔으나 1929년 전후 세계에 몰아닥친 경제공황은 전체주의 국가를 출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1920년대부터 싹트기 시작한 전체주의는 이탈리아의 파시즘, 독일의 나치즘, 일본의 군국주의, 소련의 공산주의 같은 색다른 사상을 중심한 전체주의 국가들을 등장시켰다.  

1939년 8월에 독일과 소련 간에 체결한 ‘독·소 불가침조약’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조약은 독일과 소련이 서로 상대국을 침략하지 않겠다는 약속이었지만 사실은 독일과 소련 두 나라가 연합해 영국과 프랑스에 대항한다는 의미였으므로 영국과 프랑스가 받은 충격은 매우 컸다.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독일의 히틀러는 1939년 8월 소련과의 ‘독·소 불가침조약’을 통해서 폴란드의 서부를 독일이 점령하고 동부는 소련이 접수하기로 한다는 비밀협상을 한 후 폴란드가 영국과 상호원조 조약을 맺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1939년 9월 1일 선전포고도 없이 불시에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이틀 후인 9월 3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나섰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독일군은 전쟁을 시작한 지 2주 만에 폴란드를 무너뜨렸다. 이어 독일은 1940년에 프랑스 서부전선에 공격을 감행했으며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굴복시키고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전선을 돌파해 파리를 함락시켰다. 독일이 파리를 점령하자 중립을 지키던 이탈리아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남프랑스에 진격함으로써 전쟁에 끼어들었다.


1940년 6월 프랑스와 연합해 싸우던 영국은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자 홀로 독일과의 힘겨운 전쟁을 계속했지만 처칠 수상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위기를 넘겼다.  

한편 영·독전에서 중립을 지키던 소련은 1939년 폴란드에서의 러시아인 보호라는 명분 하에 폴란드 동반부를 침략해 독일과 합의한 대로폴란드를 분할 점령하고 발트 3국인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와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한 후 이 나라들을 소련령으로 편입하는 등 제1차 세계대전시 잃었던 영토 찾기에 주력했다. 그렇게 되자 국제연맹은 소련을 회원국에서 제명했다.


1941년 6월 독일은 1939년 8월에 맺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 영내로 진격했다. 혹독한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영국은 소련과 군사동맹을 맺었고 미국도 소련에 많은 원조물자를 제공했다.


일본은 유럽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2년 전부터 중국과 힘겨운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으며 미국과 영국 등은 중국을 원조했다. 국제적으로 고립된 일본은 미국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미국이 해외에 파병한 일본군의 전면 철수를 요구하자 이에 불응하고 1941년 12월 8일 진주만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됐다.


일본은 진주만 공격과 함께 전략물자 확보를 위해 이른바 ‘남방작전’을 펴 싱가포르와 필리핀의 마닐라·수마트라 섬과 자바 섬을 점령하고 미얀마의 양곤을 함락시켰다. 이른바 춘추전국, 합종연횡시대가 전개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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