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우 칼럼] 고구려 발상지와 기원전 108년경의 영역-만주의 영토권(Ⅸ)
마나미 기자
| 2024-05-29 10:44:50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그림] 시라무렌강과 북진 의무려산 |
그러나 고구려 첫도읍지가 환인이라는 통설은 잘못된 것이다. '삼국사기'「잡지」「지리」「고구려」에 고구려 첫 도읍인 발상지 졸본(卒本)은 흘승골성(紇升骨城)과 같은 곳으로 북진 의무려산이라고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북진 의무려산의 위치는 [그림]에 표기된 바와 같이, 요하 서쪽으로 고구려가 건국할 때부터 요하 서쪽을 점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하 서쪽 북진의 의무려산 일대가 고구려 첫 수도인 졸본이라면, 선비족 영역으로 알려진 시라무렌강 남쪽에 자리 잡고 건국한 고구려가 의무려산 일대는 물론 그 북쪽 시라무렌강 유역의 선비족까지 정벌하여 요하 서쪽 영역을 점유했다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므로 유리왕 1년에 부분노의 계략으로 시라무렌강 유역의 선비족을 복속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유리왕은 재위 33년에 양맥국을 점령한다.
제3대 대무신왕 때는 고구려 북쪽의 부여를 복속한 것으로 보인다. 부여가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고구려의 속국이 되어 실질적으로 복속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대무신왕 재위 4년 12월부터 5년 2월에 걸쳐서 부여를 공격하였다.
이때 대무신왕은 부여를 공격하러 가는 과정에서 고구려와 북쪽 부여와의 사이에 있던 소규모 세력을 복속시키고 그중에 하나인 괴유가 부여 왕 대소의 목을 벤다. 대소가 죽자 대소의 막냇동생은 100여명을 이끌고 압록곡에 이르러 해두왕을 죽이고 갈사국왕이 되었다. 그리고 대소의 종제는 만여명을 이끌고 투항하였다. 대무신왕은 그를 왕으로 삼고 연나부에 두고 낙씨(絡氏)라는 성씨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부여를 제후국으로 삼아 북쪽을 안정시켰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 이후에 남쪽에 있는 개마고원이나 백두산 근처로 추정되는 개마국을 점령하여 군현(郡縣)으로 삼고 함경도 해안지역으로 추정되는 구다국을 점령한다. 그리고 함흥 북쪽의 흥원 부근에 있던 매구곡인들의 투항을 받고 재위 15년에는 평안도에 있는 최리의 낙랑국을 정벌한다.
고구려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략한 기원전 108년 이전으로 추정되는 대무신왕 재위 때까지 요하 서쪽 의현 일대와 시라무렌강 유역부터 만주 전역과 평안도까지를 영역으로 삼고 있던 것이다. 이처럼 고구려가 광범위한 영역을 점유하고 있었으므로, 고조선을 침범한 한나라가 요하를 건너서 동쪽으로 진군하는 것은 고구려와의 전쟁까지 감수해야 하므로 요하를 건너기 전에 진군을 멈췄을 것이다. 즉,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했을 당시 요하 동쪽으로 진군할 수 없던 이유 중 하나가 되는 것으로 한사군의 위치와 만주의 영토권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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