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기획 문윤국 ㉑ · 최종회]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 대도명인(大道名人)의 위대한 발자취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6-15 11:58:01
82년의 거룩한 구국 여정 혈통과 신앙의 씨앗을 뿌려
세계적 인물 배출의 영적 토대를 닦은 거목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대한민국 독립유공자이자 애국지사인 금산(錦山) 문윤국(文潤國) 선생의 일생은 민족의 암흑기를 온몸으로 돌파해 낸 거룩한 투쟁의 서사시였다. 동양의 정통 한학은 물론 기독교 신학을 비롯한 서구의 근대 학문 체계까지 깊이 통달했던 그는 당대 최고의 선구적 지식인이었다.
교육자이자 목사로서 비통한 민족의 현실을 통감한 그는, 자신의 몸과 가문 전체를 온전히 제단에 바친 우국충정의 민족운동가이자 불굴의 투사였다. 3·1 운동 전후부터 광복의 그날까지 비밀 밀사로서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고, 독립운동 자금 마련을 위해 가산을 아낌없이 쏟아붓고 평생을 바쳐 헌신했던 그의 위대한 발자취를 최종회로 정리한다.
정주의 목자, 독립의 혈맥을 대다
문윤국 지사는 1877년 1월 30일(음력)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청소년기까지 사서삼경과 경전오서 등을 섭렵하며 깊은 학문적 소양을 닦은 그는 30대 초반까지 평북 정주에서 한문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했다.
30대 중반 이후 조선기독교장로회 신도가 된 지사는 1913년(37세)부터 1917년(41세)까지 평양신학교에서 5년간 신학을 공부하고 제11회 졸업생이 되었다. 졸업 후 1919년까지 평북 정주의 덕흥, 덕성, 연봉 등 3개 교회의 담임목사로 시무하며 민족의 얼을 깨우는 영적 지도자로 활약했다.
1919년 기미년 음력 정월, 지사는 조선독립운동 발기인으로 '평북노회'를 개최하고 각 교회의 목사, 장로 및 기독교 신도 4,000여 명과 함께 독립청원서에 연명 조인했다. 이어 음력 2월 7일에는 평북 정주 오산사립고등학교에서 교직원과 남녀 학생 2,000여 명, 각 교회 신도 3,300여 명, 주민 4,000여 명과 함께 역사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전면에서 주관했다.
아울러 조선 전국 13도 대표의사들과 함께 독립청원서에 서명 날인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는 거사를 이루었으며, 1921년 9월에는 가산을 쏟아부어 마련한 독립군자금 7만 환을 만주에 있는 김숙제 목사를 통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며 임정의 혈맥을 댔다.
요시찰 인물이 되어 걸어간 은둔과 수난의 길
1920년(44세)부터 1926년(50세)까지 다시 정주의 3개 교회에서 목사로 시무하던 지사는, 51세가 되던 1927년 일제에 의해 철저한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었다. 더는 교단에 서기 어려워지자 목사직을 사임한 지사는 충남 괴산, 강원도 강릉 옥계와 정선 지방을 남몰래 전전하며 고독한 은둔 투쟁을 이어가다 1945년(69세) 마침내 해방을 맞이했다.
광복 후 꿈에 그리던 고향 정주로 향했으나 눈앞에 마주한 고향 땅은 이미 공산주의에 의해 적화되어 있었다. 결국 지사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눈물로 뒤로한 채 다시 홀로 남하할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당도한 곳이 강원도 정선군 북면 장열리였다.
정선에 거주하는 동안 지사는 정선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후 국회의원을 지낸 전상요(全相堯) 선생과 깊은 교분을 나누었다. 훗날 전상요 선생이 의정 활동 중 문윤국 지사의 소식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고하자, 젊은 시절부터 문 지사의 탁월한 학식과 덕망을 익히 알고 있었던 이 대통령이 그를 당시 대한민국 정부의 '문교부 장관'으로 모시려고 헬리콥터를 세 번이나 보내며 입각을 강력히 권유했다는 일화는 오늘날까지 위대한 전설로 전해진다.
항골 너와집에 새긴 안빈낙도, '대도명인(大道名人)'의 소천
정선 땅에서도 지사는 교육을 '제2의 독립운동'이라 여겼다. 깊은 산골에서 학동들을 모아 한시(漢詩)와 한학(漢學)을 가르치며 민족의 미래를 심었다. 노후에는 북평면 북평리 노루목(항골)에 손수 너와집을 짓고 청빈한 선비의 삶을 살았는데, 당시 지사가 창가에 앉아 느꼈던 고결한 신앙적 호흡과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심경은 그가 남긴 한시 <家在項谷(가재항골)>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家在項谷 (가재항골 : 내 집은 항골에 있네)
洞名項谷谷流川 (동명항골골류천) 동네 이름은 항골이요, 골짜기마다 맑은 시내 흐르는데
家在其間玉洞天 (가재기간옥동천) 그 품에 안긴 내 집은 신선이 사는 별천지 같구나.
日往月來何所樂 (일왕월래하소락) 해가 가고 달이 오니, 내 삶에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手携經史向窓前 (수휴경사향창전) 손에 성경과 역사서를 들고서, 고요히 창 앞을 향해 앉아 있노라.
척박한 변방의 산골짜기를 도리어 영적인 '자유의 별천지(玉洞天)'로 승화시키고, 평생 들고 다녔던 낡은 성경책과 역사서를 묵상하며 조국의 미래를 기도하던 문 지사. 그는 그렇게 청빈한 삶을 고수하다가, 1958년 1월 2일(음력) 향년 82세로 고고하게 소천하셨다.
사후 한동안 생사를 알지 못했으나, 지사가 지상을 떠난 지 9년이 지난 1968년, 가문의 종손자(從孫子)인 문용기 장로의 꿈에 수차례 나타나 정선에 거처하던 주소를 직접 일러주는 경이로운 현몽을 통해 비로소 세상에 그 존재를 다시 드러냈다. 이 장엄한 영적 공조의 배후에 있는 문 지사는 다름 아닌, 오늘날 세계적 평화 운동가이자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창시자인 문선명 총재의 종조부(從祖父)이다.
민족 독립과 향민 교육에 헌신한 위대한 은자(隱者)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사는 자신이 세운 그 고결한 애국애족의 공적과 명예를 세상에 결코 드러내려 하지 않았고, 철저한 무사(無私)와 겸손으로 일생을 지켜낸 인격자였다. 이 때문에 오늘날 기록 사료상 지사가 남긴 자금 조달의 흔적은 부족할지언정, 생애 만년을 타향의 깊은 산골에서 묵묵히 보내며 민초들의 거친 민심 속에 자신을 녹여내고 오직 후학들에게 민족의 얼을 심어준 그의 삶은 도를 깨달은 선인의 경지에 이른 '대도명인(大道名人)'의 일생 그 자체였다.
인간미와 덕성, 영성 높은 신앙과 심오한 학문 사상, 그리고 조국을 향한 실향민의 애절한 염원이 서려 있는 그의 위대한 인품은 오늘날 우리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시며 깃을 여미게 만든다.
특히 남평 문씨 종중은 고려조 중흥기를 거쳐 조선의 수난과 은둔의 문중사 속에서도 오직 충성과 정의를 목숨처럼 숭상해 온 명문가다. 문윤국 지사는 이처럼 충의로 빛나는 가풍을 거대한 정신적 맥락으로 이어받아 가문을 빛낸 위대한 표상이었다.
그는 미국으로부터 전래된 장로교 신앙을 향토와 씨족에 최초로 전승함으로써, 훗날 문선명 총재와 같은 세계적인 인물이 배출되어 인류를 위해 거대한 사역을 펼칠 수 있는 사상적 토대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닦아놓은 인물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문윤국 지사의 유서 내용과 평양 재판 기록을 통한 2년의 옥고 등 사료를 철저히 검증했다. 그 결과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군자금 7만 환을 송금한 사실과 명확한 독립운동 참여 기록이 확정됨에 따라, 1977년 12월 13일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고, 이어 1990년 12월 26일 독립유공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94년 12월 12일에는 역사적인 ‘애국지사 문윤국 선생 추모 및 건국훈장 수훈 현창회’가 성대히 개최되었으며, 2000년에는 그의 애제자 신만승 선생이 지사의 붓끝에 서린 한(恨)을 모아 『금산시집』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단행본 『끝나지 않은 전쟁』을 발간하며 세상에 그 실체를 알렸다.
나아가 2022년에는 사단법인 ‘애국지사 문윤국선생기념사업회’가 정식 등록되어 문윤국 지사의 일생을 담은 『항골 아라리』를 펴내는 등, 오늘날까지도 민족 교육의 귀중한 사료로서 지사의 의로운 행적과 위대한 유산을 끊임없이 발굴하고 선양하려는 노력이 엄숙히 이어지고 있다.
비록 광복 직후의 극심한 좌우 대립과 분단의 비극 속에서 자신의 원대한 웅지를 세상에 다 펼쳐 보이지 못한 채 은둔해야 했던 한(恨) 많은 삶이었을지라도, 거목 금산 문윤국 선생의 정신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가문의 역사 위에 거대한 산맥으로 우뚝 솟아 찬란히 빛나고 있다.
– 특별 기획 연재 ‘독립운동가 문윤국’ 제21회 최종회 끝 –
写真説明 = 文潤国志士の建国勲章愛族章。大韓民国政府が錦山・文潤国志士の崇高な独立運動の功績を称え、1990年12月に追叙した建国勲章愛族章である。
【特別企画:独立運動家 文潤国 ㉑】(最終回)時代を先駆けた先覚者、大道名人の偉大なる足跡
平北定州の万歳の歓呼から旌善項谷の板葺き屋根の家まで、八十二年の厳かなる救国旅路 血統と信仰の種を蒔き、世界的な人物輩出の霊的土台を築いた巨木
【ローカル世界=李勝敏記者】 大韓民国の独立功労者であり愛国志士である錦山・文潤国先生の生涯は、民族の暗黒期を全身で突破した厳かなる闘争の叙事詩であった。東洋の正統な漢学はもちろん、キリスト教神学をはじめとする西欧の近代的な学問体系まで深く通達していた彼は、当代最高峰の先駆的な知識人であった。
教育者であり牧師として悲痛なる民族の現実を痛感した彼は、自らの身体と家門のすべてをそっくり祭壇へと捧げた憂国忠情の民族運動家であり不屈の闘士であった。3・1運動の前後から光復のその日に至るまで、秘密の密使として全国の津々浦々を駆け巡り、独立運動資金を調達するために家産を惜しみなく注ぎ込み、生涯を捧げて献身した彼の偉大なる足跡を、最終回としてここに紐解く。
定州の牧者、独立の血脈を支える
文潤国志士は1877年1月30日(陰暦)、平安北道定州で生を受けた。幼少期から青年期にかけて四書三経や経典五書などを渉猟し、深い学問的素養を培った彼は、三十代前半まで平北定州で漢文教授として在職し後学の育成に努めた。
三十代後半に朝鮮キリスト教長長老会の信徒となった志士は、1913年(三十七歳)から1917년(四十一歳)までの五年間、平壌神学校で神学を修め、第十一回の卒業生となった。卒業後は1919年まで平北定州の徳興、徳成、延峰の三つの教会の担任牧師として牧会に当たり、民族の魂を目覚めさせる霊的指導者として八面六臂の活躍を見せた。
1919年己未年の陰暦正月、志士は朝鮮独立運動の発起人として「平北老会」を開催し、各教会の牧師や長老、およびキリスト教信徒四千余人とともに独立請願書に連名で調印した。続いて陰暦2月7日には、平北定州の五山私立高等普通学校において、教職員や男女生徒二千余人、各教会の信徒三千三百余人、近隣住民四千余人とともに、歴史的な独立万世運動を前面に立って主導した。
さらに、朝鮮全国十三道の代表医士たちとともに独立請願書に署名捺印してパリ講和会議へと提出する壮挙を成し遂げ、1921年9月には家産を傾けて工面した独立軍資金七万ウォンを、満州に滞在していた金宿祭牧師を通じて上海臨時政府へと送り届け、臨時政府の血脈を繋いだ。
要視察人物となり歩んだ隠棲と苦難の道
1920年(四十四歳)から1926年(五十歳)まで再び定州の三つの教会で牧師を務めていた志士は、五十一歳を迎えた1927年、日帝によって徹底的な「要視察人物」に指定された。もはや教壇や説教壇に立つことが困難となった志士は牧師職を辞し、忠清北道槐山、江原道江陵の玉溪、そして旌善地方へと人目を忍んで転々としながら孤独な隠棲闘争を続け、1945年(六十九歳)にようやく光復を迎えた。
光復後、夢にまで見た故郷の定州へと向かったが、目の前に広がっていた故国の大地はすでに共産主義によって赤化されていた。結局、志士は最愛の家族を涙ながらに後にし、再び単身で南下せざるを得なくなり、そうして辿り着いた安住の地が、江原道旌善郡北面長熱里であった。
旌善に居住する間、志士は旌善の代表的な義兵長であり光復後に国会議員を務めた全相堯先生と深い交誼を結んだ。後年、全相堯先生が議政活動の中で文潤国志士の消息を李承晩大統領に報告したところ、若きころから文志士の卓越した学識と徳望をかねてより熟知していた李大統領が、彼を当時の大韓民国政府の「文教部長官」として迎えるべく、ヘリコプターを三度も飛ばして入閣を強く要請したという逸話は、今日まで偉大なる伝説として語り継がれている。
項谷の板葺き屋根に刻んだ安貧楽道、「大道名人」の昇天
旌善の地にあっても、志士は教育こそが「第二の独立運動」であると信じて疑わなかった。深い山奥で子供たちを集めて漢詩や漢学を教え、民族の未来の種を蒔いた。晩年には北坪面北坪里の「ノルモク」(項谷)に自ら板葺き屋根の家を建て、清貧な文士としての生涯を送ったが、当時、志士が窓辺に腰掛けて感じていた高潔な信仰的息遣いと安貧楽道の心境は、彼が遺した漢詩 『家在項谷』に克明に息づいている。
家在項谷 (家は項谷にあり)
洞名項谷谷流川: 里の名は項谷といい、谷ごとには清らかなる渓流が流る
家在其間玉洞天: その懐に抱かれし我が家は、仙人の住まう別天地の如し
日往月來何所樂: 日が往き月が巡り来る、我が日々にこれ以上の歓びがどこにあろうか
手携經史向窓前: 手に聖書と歴史書を携え、静かに窓の前に向かって坐す
辺境の険しき山谷を、むしろ霊的な「自由の別天地(玉洞天)」へと昇華させ、生涯愛用した古びた聖書と歴史書を黙想しながら祖国の行く末を祈り続けた老志士。彼はそのように清貧の志を貫き通し、1958年1月2日(陰暦)、享年八十二歳で高潔に昇天された。
没後、しばらくの間はその生没すら分からぬ状態が続いていたが、志士が地上を去ってから9年が経過した1968年、家門の従孫である文龍基長老の夢枕に数回にわたって現れ、旌善で暮らしていた住所を直々に告げるという驚異的な顕夢を通じ、ようやく世にその存在が再び顕現することとなった。この厳かなる霊的協調の背後に立つ文志士こそ、他ならぬ、今日の世界的な平和運動家であり世界平和統一家庭連合の創始者である文鮮明総裁の従祖父その人である。
民族の独立と郷民の教育に尽くした偉大なる隠者
それにもかかわらず、志士は自らが打ち立てたその高潔な愛国愛族の功績や名誉を世に誇示しようとは決してせず、徹底した無私と謙遜の徳をもって一世を全うした人格者であった。このため、今日の記録史料のうえでは志士が遺した資金調達の足跡は不足しているやもしれぬが、生涯の晩年を他郷の深い山奥で黙々と過ごし、民草の荒々しい民心の中に自らを溶け込ませて、ただひたすらに後学へと民族の魂を植え付けた彼の生涯は、道を悟った仙人の境地に達した「大道名人」の生涯そのものであった。
人間味と徳性、霊性の高い信仰と深遠なる学問思想、そして祖国へ向けた失郷民の哀切なる祈念が込められている彼の偉大なる人品は、今日を生きる我々の目頭を熱くさせ、襟を正させる。
特に南平文氏の宗中は、高麗朝の中興期を経て朝鮮の受難と隠棲の門中史の中にあっても、ただ忠義と正義のみを命のように崇唱してきた名門の家柄である。文潤国志士は、このように忠義で輝く家風を巨大な精神的脈絡として受け継ぎ、家門を光り輝かせた偉大なる表象であった。
彼はアメリカから伝来した長老派の信仰を郷土と氏族へと最初に伝承することにより、後年、文鮮明総裁のような世界的な人物が輩出され、人類のために巨大な天命を全うできる思想的土台を、目に見えぬところで築き上げた人物なのである。
たとえ光復直後の極心の激しい左右対立と分断の悲劇の中で、自らの遠大なる雄志を世にすべて展開してみせることなく隠棲せざるを得なかった、恨 多き生涯であったとしても、巨木・錦山・文潤国先生の精神は、我が民族の歴史と家門の歴史の上に巨大な山脈として厳然とそびえ立ち、燦然と輝き続けている。
―― 特別企画大連載「独立運動家 文潤国評伝」第二十一回 最終回 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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