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문윤국 ⑨] 총성 없는 전쟁터에서 이념의 갈등을 중재하다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5-05 18:20:18
적은 외부에 있는데 어찌 동지끼리 칼을 겨누는가
7만 원’의 진정성이 보여준 화해와 결속의 힘
밀정과 암살의 위협, 흔들리지 않는 정신적 방벽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1920년대 중반의 상해는 독립운동의 성지인 동시에 거대한 혼란의 용광로였다. 외교 우선론, 실력 양성론, 무장 투쟁론이 거칠게 충돌했고,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영향으로 유입된 공산주의와 민족주의 진영 간의 대립은 임시정부의 존립마저 위협하고 있었다. 이역만리의 고단한 삶과 부족한 자금은 동지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세웠으며, 때로는 같은 민족끼리 서로를 불신하고 밀정으로 의심하는 비극이 연출되기도 했다.
총성보다 무서운 분열, 그 한복판에 선 문윤국
상해 프랑스 조계지에 발을 디딘 문윤국(文潤國) 지사 앞에 놓인 현실은 참혹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고, 그 궁핍함은 서로를 향한 날 선 비판으로 돌아왔다. 특히 독립운동의 노선을 둘러싼 분열은 총칼을 든 일제의 위협보다 더욱 치명적인 내부의 적이었다.
40대 중반의 문 지사는 이념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고 냉철함을 유지했다. 그는 정주 오산학교 시절부터 다져온 ‘교육 구국’의 신념과 목회자로서의 ‘화평’의 리더십을 무기로 갈등의 한복판에 뛰어들었다. 임시정부 회의장이 파벌 싸움으로 아수라장이 될 때마다 그는 꼿꼿하게 일어나 사자후를 토했다.
“우리가 정주 장날 피로 그린 태극기를 흔들 때, 공산주의자가 어디 있었고 민족주의자가 어디 있었는가! 오직 조선의 아들딸만 있었을 뿐이다.”
7만 원’의 진정성이 보여준 화해와 결속의 힘
문 지사가 이념과 파벌을 넘어선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그의 청렴함과 헌신이었다. 가산을 통째로 털어 마련한 7만 원이라는 거금을 조건 없이 바친 그의 숭고한 결단 앞에, 사사로운 권력을 탐하던 이들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문 지사는 자금이 끊겨 굶주림에 허덕이는 분파의 거처를 남몰래 찾아가 자금을 나누어 주며 투쟁을 독려했다. 그는 “이 돈은 내 개인의 돈이 아니라 조선의 민초들이 낸 혈세”라며, 파벌을 넘어 독립이라는 대의 아래 하나가 될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그의 거처는 상해 망명객들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고 이념의 벽을 허무는 ‘영적 쉼터’이자 ‘화해의 공간’이 되었다.
밀정과 암살의 위협, 흔들리지 않는 정신적 방벽
당시 상해의 어두운 골목은 일제의 밀정들이 독버섯처럼 피어오르던 위험한 곳이었다.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암살 시도가 빈번했고, 내부 분열을 조장하는 일제의 이간질은 교묘했다.
문 지사는 늘 암살 위협의 중심에 있었지만, 경호원 없이 낡은 성경책 한 권을 품에 안고 거리를 나섰다.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고, 동지를 팔아넘기라는 협박 앞에서도 그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내 육신은 저들의 흉탄에 쓰러질 수 있어도, 내 영혼 속에 깃든 독립의 제단은 무너뜨리지 못한다.”
40대 중반의 젊고 당당한 목회자가 보여준 이 굳건한 기개는 혼란에 빠진 상해 독립운동 진영에 거대한 정신적 방벽이 되었다. 그는 총칼과 이념의 대립 속에서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인간적 존엄’과 ‘독립의 본질’을 지켜낸 고독한 수호자였다.
–계속–
【企画連載:独立運動家 文潤国 ⑨】銃声なき戦場でイデオロギーの葛藤を仲裁する
【ローカル世界=李勝敏記者】 1920年代半ばの上海は、独立運動の聖地であると同時に、巨大な混乱のるつぼであった。外交優先論、実力養成論、武装闘争論が激しく衝突し、ロシアのボリシェヴィキ革命の影響で流入した共産主義と民族主義陣営の対立は、臨時政府の存立さえも脅かしていた。異郷の地での過酷な暮らしと不足する資金は同志たちの神経を尖らせ、時には同じ民族同士が互いを不信の目で見つめ、密偵と疑い合う悲劇が演出されることもあった。
銃声より恐ろしい分裂、その真ん中に立った文潤国
上海のフランス租界地に足を踏み入れた文潤国志士の前に置かれた現実は 참혹凄惨であった。臨時政府の要人たちは、その日の食事を心配するほどの極限の貧しさに苦しみ、その窮乏は互いに向けられた刃のような批判となって跳ね返ってきた。特に独立運動の路線を巡る分裂は、銃剣を構えた日帝の脅威よりも致命的な、内部の敵であった。
40代半ばの文志士は、イデオロギーの渦に巻き込まれることなく冷静さを維持した。彼は定州の五山学校時代から培ってきた「教育救国」の信念と、牧会者としての「和平」のリーダーシップを武器に、葛藤の真ん中へと飛び込んだ。臨時政府の会議場が派閥争いで修羅場と化すたび、彼は背筋を伸ばして立ち上がり、獅子吼を放った。
「我々が定州の定期市の日、血で描いた太極旗を振ったとき、共産主義者がどこにおり、民族主義者がどこにいたか。そこにあったのは、ただ朝鮮の息子と娘たちだけではないか」
「7万ウォン」の真正性が示した和解と結束の力
文志士がイデオロギーや派閥を超えた仲裁者の役割を果たせた最大の武器は、彼の清廉さと献身であった。家産を丸ごと投げうって工面した「7万ウォン」という巨額の資金を、何一つ条件をつけずに捧げた彼の崇高な決断の前に、私利私欲や権力を貪っていた者たちも頭を下げざるを得なかった。
文志士は、資金が途絶えて飢えに苦しむ分派の拠点を人知れず訪ねては資金を分け与え、闘争を激励した。彼は「この金は私個人の金ではなく、朝鮮の民草が納めた血税である」と語り、派閥を越えて独立という大義の下に一つになることを涙ながらに訴えた。彼の居処は、上海の亡命客たちが互いの傷を癒やし、イデオロギーの壁を打ち破る「霊的な休息の場」であり、「和解の空間」となった。
密偵と暗殺の脅威、揺るぎない精神的防壁
当時、上海の暗い路地は、日帝の密偵たちが毒キノコのように湧き上がる危険な場所であった。臨時政府の要人に対する暗殺の試みが頻発し、内部の分裂を助長する日帝の離間工作は巧妙を極めていた。
文志士は常に暗殺の脅威の中心にいたが、警護員を連れることなく、一冊の古びた聖書を胸に抱いて街へ出た。日帝の懐柔を拒絶し、同志を売り渡せという脅迫の前でも、彼の眼差しが揺らぐことはなかった。
「我が肉体は奴らの凶弾に倒れることがあっても、我が魂に宿る独立の祭壇を崩すことはできない」
40代半ばの、堂々たる牧会者が示したこの強固な気概は、混乱に陥った上海の独立運動陣営にとって巨大な精神的防壁となった。彼は銃剣とイデオロギーの対立の中でも、失ってはならない「人間の尊厳」と「独立の本質」を守り抜いた、孤独な守護者であった。
(つづく)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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