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유혹을 뿌리친 고결한 은둔: 이승만 박사의 세 번의 입각 권유와 초야의 지조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6-11 21:44:40

나는 반쪽짜리 정부에서 일할 수 없다"
통일 조국을 염원한 완강한 고사
문선명 총재가 밝히는 종조부의 기개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의 막역한 비화
문윤국 지사가 노년에 살던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북평5리 항골 여생터. 사진= AI로 당시 살던 집을 복원.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한 격동의 시기, 해방 정국의 거대한 권력 중심부는 강원도 정선의 깊은 산골에 은거 중이던 한 무명(無名)의 노인을 향해 끊임없이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노인은 다름 아닌 3·1 운동의 숨은 거목이자 상해 임시정부의 혈맥을 댔던 금산(錦山) 문윤국 지사였다. 그러나 문 지사는 건국 대통령의 집요한 부름과 참정(參政)의 기회 앞에서도 고고한 선비의 지조를 지키며 끝내 ‘정선의 고독’을 선택했다.

 문선명 총재의 엄숙한 증언: "세계 구제를 바라셨던 할아버님"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의 창시자인 문선명 총재는 생전 종조부 문윤국 지사를 또렷이 회고하며 다음과 같은 엄숙하고도 웅장한 육성 증언을 남긴 바 있다.

"3·1 운동을 전면에서 주도하는 가문에서 태어난 손자가 바로 나입니다. 문윤국 할아버님은 바로 그런 분이셨습니다.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와도 젊은 시절부터 매우 친밀한 관계이셨고, 육당 최남선 선생과도 막역한 동지이자 친구이셨습니다. 기미독립선언문을 초안할 당시 배후에서 활약한 핵심 인물 중 한 분이 바로 나의 할아버님이셨음을 나는 똑똑히 기억합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 할아버님의 무릎 위에서 '너는 이 할아비보다 훨씬 더 위대한 손자가 되어 세계를 구해야 한다'라는 엄숙한 다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할아버님은 나를 목숨처럼 사랑하셨습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이 정주에 그 유명한 오산학교를 세울 수 있도록 배후에서 사상적 동기를 부여하고 재정적 초석을 닦아준 실질적인 주역이 바로 나의 종조부, 문윤국 할아버님이십니다."

생전 문윤국 지사의 풍모는 당당하면서도 따뜻했다. 평소 외출할 때는 중절모를 쓰고 푸르스름한 도포를 입었으며, 평생 죽장을 즐겨 짚었다. 인정이 많고 자손들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목소리는 우렁찼고 성품은 늘 쾌활했으나, 그 내면에는 누구도 꺾지 못할 강직함이 서려 있었다. 항상 건강을 강조하며 아침 운동으로 산책을 거르지 않았고, 생활은 지독하리만치 부지런했다. 특히 찰밥이나 메밀묵 등을 즐겨 들었던 문 지사는 노년에 이르러 머리가 벗겨지고 허리가 조금 굽은 소박한 노인의 모습으로 정선 주민들과 어우러져 살았다.

 서울 경무대에서 정선 산골로 보낸 세 번의 헬리콥터

1948년경, 정선에 은거하던 문 지사가 한때 공산당으로 오인당해 조사받는 황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지사의 거취와 신원이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서울 경무대(대통령 집무처)에 알려지게 되었다. 일찍이 문 지사와 깊은 교분(交分)을 가졌던 이승만(李承晩, 1875~1965) 박사는 지사의 생존 소식을 듣자마자 정선 군수와 경찰서장 등을 통해 무려 세 번이나 헬리콥터를 정선으로 보내 입각(入閣)을 강권했다.

여기에 3·1 운동을 함께 주도했고 예수교장로회와 기독교장로회 총회장을 거쳐 제3대 부통령을 지낸 동문 함태영(咸台永, 1873~1964) 선생도 문 지사의 정치 참여를 적극적으로 권유해 왔다. 신학문과 구학문에 모두 능통했던 거목의 존재는 건국 초기 대한민국 정부에 너무나도 절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산 문윤국 선생의 대답은 단호했다.

"내가 반쪽짜리 정부에서 일할 수 없다."

지사는 남북이 분단된 불완전한 형태의 단독 정부에 참여하기보다, 온전한 통일 조국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권력의 영예를 완강하게 고사하고 끝내 초야에서 여생을 보냈다. 광복 직후 지사가 그 좋은 참정의 기회를 마다하고 은둔했던 진짜 이유가 이 대목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다만, 문윤국 지사는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에 당선될 때마다 옛정을 생각하여 축시(祝詩)를 지어 보냈고, 이 박사 역시 경무대에서 깊은 사례의 글과 사례품을 보내오곤 했다. 그러던 중 이 박사의 집요한 초대에 못 이겨 한 번은 서울로 나가 극적으로 대면하고 돌아온 적은 있었으나, 선생은 청빈과 은둔의 고고한 선비적 삶을 끝내 꺾지 않았다.

문선명 총재는 이러한 종조부의 너무나도 청렴하고 완고했던 은둔의 삶에 대해 종종 아쉬운 심경을 표출하기도 했다.

"우리 셋째 할아버지가 정치적인 풍토가 있고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순진한 기독교 목사였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돌아와서 나라를 세웠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필요했습니다. 구학문에 능통하지 신학문에 능통하고 그러니까, 정선에 있을 때 헬리콥터로 세 번씩이나 모시러 왔다고 합니다. 그래도 ‘아, 나는 정치 안 한다. 신앙하는 사람이 정치하는 것은...' 이랬습니다. 그래서 이 박사하고 하나 안돼서 그렇지 만약에 하나됐더라면 얼마나 멋졌겠습니까?"

 역사적 동지들과의 거룩한 교류, 마침내 복원된 정주 만세운동의 실체

문 지사가 정선 장열리에 머물던 시절, 외롭던 은둔의 삶은 역사적 동지들과의 교류로 채워졌다. 정선 출신의 의병장이자 독립운동가로서 광복 후 국회의원을 지낸 전상요(全相堯, 1878~1971) 선생은 장열리의 처소를 자주 왕래하며 교분을 나누었고, 이승만 박사와의 사이에서 정치적 중계 역할과 소통을 담당해 주었다.

또한,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김병조 목사의 자제로서 1953년 10월부터 정선 남평초등학교와 임계초등학교 교감으로 재직했던 김행식(金行湜, 1925~2018) 선생도 정선의 처소로 문윤국 지사를 찾아와 깍듯이 인사를 드리곤 했다. 김행식 선생은 이후 기독교 목회자로서 헌신하며 민족대표 33인 유족회장, 국가원로회 원로위원 등을 두루 역임하고 독립운동사에 관한 수많은 저술을 남긴 인물이다.

특히 부친인 김병조 목사는 저서 『한국독립운동사략』을 통해 금산 문윤국 선생이 평북 정주 만세운동 당시 펼쳤던 위대한 활약상을 상세히 다루었으며, 아들 김행식 선생 역시 자신의 저술에서 이를 소중히 인용하여 세상에 알렸다. 경무대의 삼엄한 부름과 역사의 풍랑 속에서도 끝내 훼손되지 않았던 인간 문윤국. 그의 청빈과 통일 조국을 향한 숭고한 침묵은 참된 지도자의 길이란 무엇인가를 오늘날 우리에게 웅장하게 웅변하고 있다.

-계속-

【ローカル世界=李勝敏記者】 1948年の大韓民国政府樹立を前後する激動の時期、解放政国の巨大な権力の中枢は、江原道旌善の深い山奥に隠棲していた一人の無名の老人に向けて、絶えず手を差し伸べていた。

その老人とは、他ならぬ3・1運動の隠れた巨木であり、上海臨時政府の血脈を支えた錦山・文潤国志士であった。しかし志士は、建国大統領の執拗な呼び声や参政の機会を前にしても、高潔なる文士の節義を守り抜き、最後まで「旌善の孤独」を選択した。

 文鮮明総裁の厳かなる証言:「世界の救済を願われたおじい様」

世界平和統一家庭連合の創始者である文鮮明総裁は、生前に従祖父である文潤国志士を鮮明に回顧し、次のような厳かでありながらも壮大な肉声の証言を遺している。

「3・1運動を前面に立って主導した家門に生まれた孫が、まさに私です。文潤国おじい様は、まさにそのようなお方でした。建国大統領の李承晩博士とも若いころから極めて親密な関係にあり、六堂・崔南善先生とも莫逆の同志であり友人でした。己未独立宣言書を起草する当時、背後で活躍した核心的な人物の一人が、まさに私のおじい様であったことを、私ははっきりと記憶しています。

私は幼いころから、そのおじい様の膝の上で『お前はこのじいさんよりもはるかに偉大な孫となり、世界を救わねばならない』という厳かな誓いを聞きながら育ちました。おじい様は私を命のように愛してくださいました。南江・李昇薫先生が定州にあの有名な五山学校を設立できるよう、背後から思想的な動機を与え、財政的な礎を築いた実質的な主役こそ、私の従祖父、文潤国おじい様なのです」

生前の文潤国志士の風貌は、堂々としていながらも温厚であった. 普段、外出する際には中折れ帽をかぶり、青みがかった道袍をまとっており、生涯にわたり竹杖を好んで突いていた. 情に厚く、子孫たちを親のように温かく包み込んだ. 声は朗々と響き、気性は常に快活であったが、その内面には何者もへし折ることのできない剛直さが宿っていた. 常に健康を重んじて朝の運動としての散策を欠かさず、生活は極めて勤勉であった. 特に強飯(こわめし)や蕎麦掻き(そばがき)などを好んで食した志士は、晩年に至って髪が薄くなり、腰が少し曲がった、素朴な老人の姿で旌善の住民たちと融和して暮らしていた.

 ソウル景武台から旌善の山奥へ飛ばされた三度のヘリコプター

1948年ごろ、旌善に隠棲していた文志士が、一時共産党と誤認されて取り調べを受けるという理不尽な事件が発生した。この過程で、志士の去就と身元が国政の最高責任者であるソウル景武台(大統領執務所)に知れることとなった。かねてより文志士と深い交分を結んでいた李承晩(1875~1965)博士は、志士の生存を知るやいなや、旌善郡守や警察署長らを通じて、実に三度もヘリコプターを旌善へと飛ばし、入閣を強く迫った。

ここに、3・1運動を共に主導し、イエス教長老会およびキリスト教長老会の総会を経て第3代副大統領を務めた同門の咸台永(1873~1964)先生も、文志士の政治参与を積極的に勧めてきた。新学問と旧学問の双方に精通した巨木の存在は、建国初期の大韓民国政府にとってあまりにも切実だったからである。しかし、錦山・文潤国先生の答えは毅然たるものであった。

「私は、半切れの政府で働くことはできない」

志士は、南北に分断された不完全な形態の単独政府に参画するよりも、完全なる統一祖国を希求する一念から、権力の栄誉を頑なに辞退し、最後まで草野で余生を送った。光復直後、志士がその絶好の参政の機会を排して隠棲した真の理由が、この一節において明白に顕れている。

ただし、文潤国志士は李承晩博士が大統領に当選するたびに旧誼を思い、祝詩を詠んで送り、李博士もまた景武台から深い謝意を込めた書状と謝礼品を送り届けていた。そうした中、李博士の執拗な招待に抗いきれず、一度だけソウルへ赴いて劇的な対面を果たして戻ってきたことはあったようだが、先生は清貧と隠棲の高潔なる文士の生を生涯曲げることはなかった。

文鮮明総裁は、このような従祖父のあまりにも清廉で頑固な隠棲の生涯について、しばしば惜惜たる心境を吐露することもあった。

「私の三番目のおじい様が、政治的な気風を持っておられたなら良かったのですが、純真なキリスト教の牧師でした。李承晩博士が帰国して国を建てたとき、私たちのおじい様が必要だったのです。旧学問に通じ、新学問にも通じておられたから、旌善におられたとき、ヘリコプターで三度も迎えに来られたそうです。それでも『あぁ、私は政治はしない。信仰する者が政治をするということは…』と、こうでした。ですから、李博士と一つになれなかったことが惜しまれますが、もし一つになっていたなら、どれほど素晴らしかったことでしょうか」

歴史的同志たちとの神聖なる交流、ついに復元された定州万歳運動の実体

文志士が旌善の長熱里に身を寄せていた時期、孤独であった隠棲の生は、歴史的同志たちとの交流によって満たされていた。旌善出身の義兵長であり独立運動家、光復後に国会議員を務めた全相堯(1878~1971)先生は、長熱里の処所を頻繁に往来して交誼を重ね、李承晩博士との間における政治的な中継役と疎通を担っていた。

また、3・1運動の民族代表33人の一人である金柄祚牧師の子息であり、1953年10月から旌善の南坪初等学校および臨渓初等学校の教頭として赴任していた金行湜(1925~2018)先生も、旌善の処所へと文潤国志士を訪ねては、慇懃に挨拶を捧げていた。金行湜先生はその後、キリスト教の牧会者として献身し、民族代表33人遺族会長、国家元老会元老委員などを歴任し、独立運動史に関する数多くの著述を遺した人物である。

特に父である金柄祚牧師は、著書『韓国独立運動史略』を通じて、錦山 文潤国先生が平安北道定州の万歳運動当時に繰り広げた偉大なる活躍の様相を詳細に記述しており、息子の金行湜先生もまた、自らの著述においてこれを大切に引用し、世に知らしめた。景武台の厳厳たる呼び声と歴史の荒波の中にあっても、ついに損なわれることのなかった人間・文潤国。彼の清貧と統一祖国への崇高なる沈黙は、真の指導者の歩むべき道とは何であるかを、今日を生きる我々へ雄弁に物語っている。

―つづ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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