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밝아질 때, 마음은 역설적인 불편함에 직면한다. 그 불편함은 사실(Fact)과 진실(Truth)을 마주했다는 신호이자, 우리가 얼마나 익숙한 오류 속에 안주해 왔기를 일깨우는 양심의 파동이다. 혜안(慧眼)이란 세상을 단번에 꿰뚫어 보는 신통력이 아니다. 그것은 거울 앞에 선 구도자처럼 자신의 한계를 겸허히 인정할 용기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우리는 변화의 시대를 역설하면서도, 정작 그 변화가 요구하는 뼈아픈 자기 쇄신 앞에서는 본능적으로 멈춰 선다. 인간의 정신은 익숙한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섭취하는 확증 편향의 고착화에 갇히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을 업데이트하지 않은 채 낡은 운영체제(OS)와 과거의 잣대로 오늘을 재단하는 순간, 우리의 사고는 이미 치명적인 시스템 에러를 일으키며 멈춰 선다.
이러한 에러는 우리 사회 곳곳에서 파열음을 낸다. 변화를 거부하는 정치의 오만과 상명하복에 갇힌 직장 내 권위주의가 그러하며,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정보 사회의 확증 편향과 진리를 독점하려는 종교의 선택적 권위가 그 증거다. 이 모든 불통은 세대 갈등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벽으로 귀결되어 공동체의 미래를 가로막는다. 좌정관천(坐井觀天)의 좁은 시야에 갇혀 허물을 벗지 못한 뱀이 자멸하듯, 낡은 코드를 고집하는 지적 정체는 타인을 향한 무지한 냉소나 원래 그랬다는 비겁한 변명으로 투영될 뿐이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낙후를 넘어, 데이터가 오염된 알고리즘처럼 사회적 신뢰를 왜곡시킨다. 참으로 서글픈 자화상이다.
시대의 도도한 흐름은 결코 머뭇거리는 이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정신의 쇄신은 취향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외면할수록 소멸이라는 대가를 요구하는 생존의 절대 명령이다. 더 큰 가치를 위해 지금은 허물을 벗어야 한다. 우리는 이제 나이 듦이 곧 지혜가 아님을, 성찰 없는 확신이 얼마나 위험한 독단이 될 수 있는지를 뼈아쁘게 직시해야 한다. 오늘날 발언의 무게는 계급장이나 연륜이 아니라, 사실과 상식에 대한 정직한 존중에서 결정된다. 내가 옳으니 너는 들어라는 식의 고압적인 자세로는 더 이상 누구의 마음도 얻을 수 없다.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근거가 시대의 결핍을 읽어내는 치열한 공감을 만날 때, 그 말에 생명력이 깃들고 권위가 세워진다. 여기서의 공감은 타인의 비위를 맞추는 영합이 아니다. 상대의 고통과 시대의 요구를 자신의 것처럼 감각하려는 처절한 지적 정직함이다. 이를 망각한 채 오답임을 알면서도 기득권의 성벽을 지키려 고집을 부리는 태도는 타인과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것을 넘어, 공동체를 고립된 섬들로 전락시키는 사회적 재앙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진정한 지혜는 정답을 가졌다고 과신하는 오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하며 자신을 수정해 나가는 지적 겸손에 있다.
낡은 사고의 껍질을 벗겨내는 일은 생살을 도려내는 듯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을 통과해야만 새로운 시대의 맑은 공기를 허락받을 수 있다. 오늘 나의 확신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는 성실한 지성의 용기를 내어보자. 성찰이라는 이름의 업데이트를 멈추지 않는 것, 그것이야말로 낡은 시대를 건너 새 시대로 나아가는 가장 확실한 생존 전략이자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갖추어야 할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예의이며, 신뢰의 초석이다.
박범철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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