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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해부루에 대한 정리는 하였으니 동·북부여의 건국연대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기원전 217년으로 비정(比定)하면 부여의 건국연대와 여러 가지 고대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정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초기의 부여, 즉 고조선 시대 신조선의 소국이중 하나였던 부여에 대해서가 아니라 동명왕의 부여는 물론 해모수가 손에 넣어 북부여라고 한 해모수의 부여, 즉 북부여에 대한 건국연대와 동부여의 건국연대는 건국설화를 중심으로 고찰해 보면 구해낼 수 있다.
왜냐하면 북부여의 건국설화는 고구려와 연관되어 있고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비정하였으니 그로 인해서 추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건국설화라고 하지만 그것들에서 신화적인 요소를 제외하고 현실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기반으로 두 나라의 건국에 대해 비교해 봄으로써 동·북부여의 건국연대를 비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기록이 없음으로 귀납적 추론을 위한 가설에 의해 추론해 보기로 한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북부여와 동부여, 고구려는 신조선의 판도 내에서 세워진 나라들이다. 그러나 신조선이 멸망하여 부여왕조가 되고, 부여가 다시 분열하여 위의 3국이 되었는지 아니면 부여는 곧 신조선의 별명이고 따로 부여란 왕조가 없이 신조선으로부터 위의 3국이 되었는지 이에 대해서는 고찰할 근거가 없다’라고 하며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신채호만의 일이 아니다. 광개토경평안호태왕 능비에 추모왕이 태어난 곳이 북부여라고 되어있지만 그 모체에 대한 역사적 근거가 없기에 설왕설래한 것이다.
김병룡을 비롯한 북한의 학자들은 「후부여(부여봉건국가)의 형성과 그 력사적 변천」에서, 해모수의 부여는 부여라고 했고 북부여는 고구려 사람들이 ‘북쪽의 나라인 부여국’이라는 의미에서 쓰인 것으로 실제의 북부여는 다른 의미라고 주장한다.
북한 학자들은 고구려 건국연대가 기원전 277년이라는 주장하에 “부여가 대소왕이 전사한 기원전 219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악전고투 끝에 고구려군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이 전쟁에서 받은 타격은 부여사회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부여가 패전하고 대소가 죽게 되자 이해 3월에 왕의 막내 동생이 자기를 추종하는 자 100여명을 이끌고 갈사수에 가서 ‘갈사국’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며 그로부터 얼마 후에는 왕의 4촌 동생이 만여명의 주민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귀순하였다.
'진서'「부여전」에 의하면 모용선비 모용외는 285년 대규모의 병력으로 부여를 침략하여 엄청난 재물과 인력을 수탈하여 갔으며, 부여왕실 일부는 옥저지방으로 피신하였으나 부여왕 의려는 피신하지 못하고 자살하였다. 그러므로 부여에서는 이듬해 왕자 의라를 왕으로 내세우고 국가 재건을 꾀하였다.
하지만 부여 왕실의 일부 세력은 그냥 북옥저에 남아 하나의 딴 나라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동부여’다. 또한 285년의 전쟁 후에도 모용선비가 자주 침략하여 재물과 사람을 약탈해 감으로써 생산은 감퇴하고 백성들은 살길을 찾아 유랑하고 지배층 안에서는 알력과 분쟁이 날로 심해져서 3세기말~4세기 초에 북쪽 일부지역을 떼어 분립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북부여’다”라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부여라는 모체가 없이 북부여라고 했다는 것에 대한 이견이 발단된 단순한 추론에 지나지 않는다. 아울러 동부여에 대한 주장에 그 연도와 건국에 대해 심각한 모순까지 내포하고 있다.
먼저 ‘갈사국’과 ‘동부여’의 관계다.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의하면 “‘갈사국’은 ‘가시라’ 즉 삼림국(森林國)이라는 뜻으로 이것을 중국 사가들이 ‘옥저’라고 지칭한 것”이다. 그런데 북한 학자들은 기원전 219년 부여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부여가 고구려 군을 물리치기는 했으나 부여가 패전하고 대소가 죽게 되자 이해 3월에 왕의 막내 동생이 자기를 추종하는 자 100여명을 이끌고 갈사수에 가서 ‘갈사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고 했으며, 285년 모용선비 모용외의 침략으로 인해서 엄청난 재물과 인력을 수탈당하고 부여왕실 일부가 옥저지방으로 피신하였다가 부여 왕실의 일부 세력이 그냥 북옥저에 남아 하나의 딴 나라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동부여’라고 하였다.
‘옥저’가 바로 ‘갈사국’을 지칭하는 말인데 기원전 219년에 ‘갈사국’을 세우고 285년에는 왕실 일부가 ‘북옥저’로 피신하였다가 거기에 남아 ‘동부여’를 세웠다고 한 것 자체가 모순이다. 이것은 이미 기원전 219년에 ‘갈사국’이라는 나라 즉, ‘옥저’를 세웠거나 아니면 ‘동부여’가 건국되었고 285년에 왕실 일부가 그곳으로 피신하였다가 돌아오지 않은 것임에도 ‘옥저’와 ‘갈사국’이 같은 나라라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하여 굳이 구분해서 만들어 낸 학설이다.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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