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문윤국⑤] 성경에 숨겨온 비밀, 정주 땅의 함성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4-20 07:02:10
이승훈의 간곡한 부탁 “거사 실패하면 남아서 뒷일을 도모해달라”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1919년 초, 고종 독살설로 민심이 흉흉하던 서울의 밤. 남산 자락 아래 비밀스럽게 모인 사내들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 중심에는 평안북도 정주의 정신적 지주이자 오산학교를 이끌던 문윤국(文潤國) 지사가 있었다. 그는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들이 결집하던 비밀 회동에서 이승훈, 함태영 등과 긴밀히 접촉하며 범민족적 독립운동의 밑그림을 그린 핵심 설계자였다.
당시 회동에서 문윤국은 단순한 참석자가 아니었다. 그는 "말뿐인 독립이 아니라, 목숨을 담보로 한 실천"을 강조하며 좌중을 압도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결연한 의지를 보이기 위해 손가락을 깨물어 피로 쓴 독립 서약서를 남겼을 만큼 그 기개가 뜨거웠다.
33인 명단에서 물러난 ‘최후의 보루’
문윤국 지사는 본래 민족대표 33인의 초기 구성원이었다. 기미독립선언서 초안에도 그의 이름은 당당히 올라 있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에게 '중앙의 주역'이 아닌 '현장의 사령관'이라는 다른 배역을 맡겼다.
결정적인 계기는 거사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승훈 장로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이 장로는 문윤국에게 “이번 거사가 실패할 경우, 뒷일을 도모해달라”는 막중한 책무를 맡겼다. 지도부가 일제히 체포될 상황을 대비해 조직을 재건하고 항쟁을 지속할 '최후의 보루'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문윤국은 자신의 이름을 내어주고 이명룡 장로와 김병조 목사를 대신 세우며, 실무적 후속을 기약하는 전략적 결단을 내렸다.
왜 서울이 아닌 ‘정주’였나
민족대표들이 서울 태화관에 모일 준비를 할 때 문윤국이 정주행 기차에 몸을 실은 데에는 세 가지 치밀한 전략적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혁명의 엔진’ 오산학교였다. 그가 세운 오산학교의 학생과 교사들은 언제든 독립군으로 전환될 수 있는 조직적인 ‘준비된 군대’였다.
둘째는 지정학적 요충지로서의 가치다. 정주에서 불길이 타올라야 평안도 전역과 만주 지역까지 항쟁의 신호탄을 보낼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엘리트 중심의 운동을 넘어 기독교 세력과 농민이 결합한 ‘민초의 폭발력’을 믿었다.
성경 표지 속에 숨긴 ‘해방의 복음’
1919년 2월 말, 서울에서 내려온 독립선언서 뭉치를 받아 든 문윤국의 운반책은 그가 평생 받들어온 성경책이었다. 그는 성경의 두꺼운 표지 안쪽을 정교하게 도려내 선언서를 끼워 넣었다. 일경의 삼엄한 가가호호 수색 속에서도 독실한 목회자의 성경 속에 제국주의를 무너뜨릴 ‘폭탄’이 들어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오산학교 지하실의 핏빛 태극기, 정주 장날의 희망이 되다
거사를 불과 며칠 앞둔 밤, 정주 오산학교에는 희미한 등잔불이 켜졌다. 창문을 담요로 겹겹이 막은 삼엄한 감시 속에서, 문윤국과 제자들은 숨소리조차 죽이며 태극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물감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극한의 상황 속에서 그들은 주저 없이 손가락을 깨물었다. 자신들의 선혈을 섞어 태극의 붉은 면을 그려 넣었다. 가위질 소리 하나에도 목숨이 오가던 그 밤, 서로의 심장 소리에 의지하며 제작한 수백 장의 ‘혈제(血製) 태극기’는 독립을 향한 결사 항전의 의지 그 자체였다. 문윤국의 유서 《학업과 경력》에는 이러한 긴박했던 정황과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태극기가 우리의 수의(壽衣)가 될지언정"
모든 준비를 마친 문윤국은 제자들의 손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기도했다.
"주여, 이 깃발이 내일 정주의 하늘에 휘날릴 때, 우리 민족의 눈물을 닦아 주소서.
이 태극기가 우리의 수의가 될지언정 결코 굴복하지 않게 하소서."
그에게 독립운동은 곧 신앙의 완성이었다. 기도를 마친 그는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한 채 정주의 새벽 공기를 들이켰다. 이제 곧 이 고요한 도시는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참이었다.
정주 땅을 뒤흔든 노도와 같은 함성
1919년 3월 7일, 평안북도 정주군 갈산면 아이포(阿耳浦) 장날. 5일장의 활기 대신 그날의 아이포는 폭풍전야의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장꾼들의 지게 속, 아낙들의 치맛자락 안에는 전날 밤 피로 그려낸 태극기들이 숨겨져 있었다. 무리의 선두에는 마침내 성경책에서 독립선언서를 꺼내 든 문윤국 지사가 서 있었다.
약속된 시간이 되자 문윤국은 장터 한복판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섰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그의 목소리는 사자후가 되어 정주 땅을 파고들었다. 낭독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포 장터는 하얀 광목천과 핏빛 태극 문양으로 뒤덮였고, 하늘을 뒤흔드는 만세 함성이 노도와 같이 터져 나왔다.
일제의 총칼에 맞선 비폭력의 힘
일본 기마헌병들이 칼을 휘두르고 총성이 하늘을 갈랐지만, 문윤국의 대열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일경의 총구 앞에서도 "비겁하게 고개를 숙이지 마라! 우리는 죄인이 아니라 이 나라의 주인이다!"라고 외치며 행진을 독려했다. 그의 기개에 압도된 일본 순사들조차 선뜻 그를 베지 못하고 주춤거릴 정도였다.
정주에서 시작된 이 불씨는 압록강 너머 만주벌판까지 전해졌다. 현장에서 체포되면서도 문 지사는 곁의 제자에게 말했다.
"보아라, 저들이 우리 몸은 묶을 수 있어도, 이미 터져 나온 저 함성은 결코 가두지 못할 것이다."
이어 제6회는 "철창 너머의 기도" - 체포된 문윤국 지사의 혹독한 옥중 고난과 감옥 안에서도 멈추지 않았던 교육 철학 및 독립을 향한 집념을 살펴본다.
【企画連載 文潤国 ⑤】 聖書に隠した秘密、定州の地に響いた叫び
【ローカル世界=李勝敏 特派員】 1919年初頭、高宗毒殺説により民心が荒立っていたソウルの夜。南山の麓に密かに集まった男たちの間に、張り詰めた緊張感が漂っていた。
その中心には、平安北道・定州の精神的支柱であり、五山学校を率いていた文潤国志士がいた。彼は天道教とキリスト教の指導者たちが結集した秘密会合において、李昇薫、咸台永らと緊密に接触し、汎民族的な独立運動の設計図を描いた核心人物であった。
当時の会合で文潤国は単なる出席者ではなかった。彼は「言葉だけの独立ではなく、命を賭した実践」を強調し、座中を圧倒した。記録によれば、彼は自らの決然たる意志を示すため、指を噛み切り血で書いた独立誓約書を残したほど、その気概は熱いものだった。
33人の名簿から退いた「最後の手札」
文潤国志士は、本来「民族代表33人」の初期メンバーであった。己未独立宣言書の草案にも、彼の名は堂々と記されていた。しかし、歴史は彼に「中央の主役」ではなく「現場の司令官」という別の役割を与えた。
決定的なきっかけは、運動の核心人物であった李昇薫長老の切実な願いだった。李長老は文潤国に対し、「今回の挙行が失敗した場合、後事を図ってほしい」という重大な責務を託した。
指導部が一斉に逮捕される事態に備え、組織を再建し抗争を継続させるための「最後の手札」が必要だったからだ。これを受け、文潤国は自らの名を下げ、代わりに李明龍長老と金秉祚 牧師を立て、実務的な後続を期するという戦略的決断を下した。
なぜソウルではなく「定州」だったのか
民族代表たちがソウルの泰和館に集まる準備をしていた時、文潤国が定州行きの列車に身を投じたのには、3つの緻密な戦略的理由があった。
「革命のエンジン」五山学校: 彼が設立した五山学校の生徒と教師たちは、いつでも独立軍に転換できる組織的な「準備された軍隊」であった。
地政学的要衝としての価値: 定州で火の手が上がってこそ、平安道全域と満州地域まで抗争の信号を送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判断だった。
民衆の爆発力: エリート中心の運動を超え、キリスト教勢力と農民が結合した「民草のエネルギー」を信じていた。
聖書の表紙に隠した「解放の福音」
1919年2月末、ソウルから届いた独立宣言書の束を受け取った文潤国の運搬手段は、彼が生涯大切にしてきた聖書だった。彼は聖書の厚い表紙の内側を精巧に切り抜き、宣言書を差し込んだ。
日本警察による厳重な家宅捜索の中でも、敬虔な牧師の聖書の中に帝国主義を打ち砕く「爆弾」が入っているとは、誰も想像だにしなかった。
五山学校地下室の血塗られた太極旗、定州の市日の希望となる
挙行を数日後に控えた夜、定州・五山学校には微かな灯火がともされた。窓を毛布で幾重にも塞いだ厳戒態勢の中、文潤国と弟子たちは息を殺して太極旗を作り始めた。
絵の具さえ入手困難だった極限の状況下で、彼らは躊躇なく自らの指を噛み切った。鮮血を混ぜ合わせ、太極の赤い面を描き入れた。
ハサミの音一つで命が左右されるような夜、互いの鼓動を頼りに制作された数百枚の「血製太極旗」は、独立に向けた決死の抗戦意志そのものだった。文潤国の遺書『学業と経歴』には、当時の緊迫した状況と苦悩が克明に記されている。
「この太極旗が我々の死装束(寿衣)になろうとも」
すべての準備を終えた文潤国は、弟子たちの手を握り、低い声で祈った。 「主よ、この旗が明日、定州の空に翻る時、我が民族の涙を拭いたまえ。この太極旗が我々の死装束になろうとも、決して屈服せぬよう導きたまえ」
彼にとって独立運動とは、すなわち信仰の完成であった。祈りを終えた彼は一睡もすることなく、定州の夜明けの空気を吸い込んだ。まもなく、この静かな町は歴史の巨大な渦に飲み込まれようとしていた。
定州の地を揺るがした怒涛の叫び
1919年3月7日、平安北道・定州郡葛山面、阿耳浦の市日。いつもの活気の代わりに、その日の阿耳浦は嵐の前の静けさと緊張感に包まれていた。
商人の背負子の中、女たちのスカートの裾の下には、前夜に血で描かれた太極旗が隠されていた。群衆の先頭には、ついに聖書から独立宣言書を取り出した文潤国志士が立っていた。
約束の時間になると、文潤国は市場の真ん中にある最も高い場所に立った。 「我らはここに、我が朝鮮が独立国であること、および朝鮮人が自主民であることを宣言する!」
彼の声は獅子吼となり、定州の地へと染み渡った。朗読が終わるやいなや、阿耳浦の市場は白い綿布と血色の太極模様で埋め尽くされ、天を揺るがす万歳の叫びが怒涛のように沸き起こった。
日本の銃剣に立ち向かった非暴力の力
日本の騎馬憲兵が刀を振り回し、銃声が空を切り裂いたが、文潤国の列が乱れることはなかった。彼は日本警察の銃口の前でも「卑怯に頭を下げるな!我々は罪人ではなく、この国の主だ!」と叫び、行進を鼓舞した。その気概に圧倒された日本の巡査たちでさえ、容易に彼を斬ることができず、躊躇するほどであった。
定州で始まったこの火種は、鴨緑江を越えて満州の原野まで伝えられた。現場で逮捕されながらも、文志士は傍らの弟子に語った。 「見よ。彼らが我々の体を縛ることはできても、すでに放たれたあの叫びを決して閉じ込めることはできないのだ」
次回 第6回は「鉄格子の向こうの祈り」 逮捕された文潤国志士の過酷な獄中苦難と、監獄の中でも止むことのなかった教育哲学、そして独立への執念について探る。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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