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문윤국 ⑥] 문윤국과 유관순, 철창 너머의 기도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4-22 11:18:54

유관순과 문윤국, 차가운 감옥 벽을 사이에 둔 두 성도(聖徒)
취조실의 냉기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기개 
"나는 죄인이 아니라 포로다" – 당당했던 법정 투쟁
신앙으로 벼텨낸 불굴의 독립 의지 
1919.3.7. 문윤국이 앞장선 아이포면사무소 뒷산에서의 만세운동. 사진 이승민 기자.(당시의 상황을 AI로 복원)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1919년 3월 7일, 정주 아이포 장터의 함성이 잦아든 자리에는 서슬 퍼런 일제의 총칼이 내려앉았다. 대열의 선두에서 독립선언서를 사자후로 토해냈던 문윤국(文潤國) 지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차가운 철창에 갇히게 된다. 그로부터 1921년 하반기 출옥까지, 만 2년 6개월(약 910일)에 걸친 옥중 사투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거대한 항일 전쟁이었다.

유관순과 문윤국, 차가운 감옥 벽을 사이에 둔 두 성도(聖徒)

 1919년 가을, 서대문형무소의 공기는 유독 무거웠다. 그해 3월,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다 붙잡혀온 17세 소녀 유관순과 정주 아이포 장터의 거사를 이끌었던 43세의 목사 문윤국은 같은 담장 안에 갇힌 수금(囚禁)의 동지였다.

비록 남사와 여사로 나뉘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수는 없었으나, 두 사람은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나님께 조국의 독립을 간구하던 신앙의 동역자였다. 

유관순이 8호 감방에서 기도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울 때, 문윤국은 인접한 사방에서 벽을 두드리는 '타벽 통신'으로 복음의 진동을 전하고 있었다.

그는 절망에 빠진 동지들에게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멀지 않았다"며 용기를 북돋웠다. 옥중 동지들에게 그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게 하는 영적 지주이자 정신적 스승이었다.

취조실의 냉기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기개 

만세 함성의 대가는 혹독했다. 거친 포승줄에 묶여 정주경찰서로 압송되는 순간에도 문 지사는 뒤처진 제자들을 향해 "두려워 마라,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취조실의 희미한 불빛 아래, 밤낮없이 자백을 강요하는 일경의 구둣발과 채찍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문윤국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배후를 묻는 고문관에게 그는 오직 한마디로 응수했다. "배후는 오직 조선의 하늘과 민족의 가슴뿐이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 포로다" – 당당했던 법정 투쟁 

재판정에 선 문윤국 지사는 일본 판사를 향해 당당히 외쳤다. "나는 일본 법의 심판을 받을 죄인이 아니다. 나라를 되찾으려는 정당한 전쟁에서 잡힌 포로일 뿐이다. 나를 처벌하려거든 국제법에 따라 하라."

그의 논리 정연한 항변은 일제 법정을 당혹감에 빠뜨렸다. 그는 스스로를 국권 회복 전쟁의 전사로 규정하며 일제의 사법권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결국 그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죄목으로 징역 2년 6개월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일제가 문윤국이라는 인물이 지닌 영향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방증하는 결과였다.

신앙으로 벼려낸 불굴의 독립 의지 

두 사람의 생애는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유관순이 매봉교회와 이화학당을 통해 근대적 신앙과 애국심을 키웠다면, 문윤국은 정주 석산교회와 오산학교를 거점으로 교육 구국운동에 투신했다. 이들에게 독립운동은 단순히 정치적인 해방을 넘어, 하나님이 주신 '자유'라는 천부인권을 회복하는 성스러운 사명이었다.

재판정에서의 기개 또한 평행이론을 이룬다

"너희가 무슨 권리로 나를 심판하느냐"며 일제의 사법권을 꾸짖었던 유관순의 서슬 퍼런 호통은, "나는 죄인이 아니라 정당한 전쟁에서 잡힌 포로다"라고 외치며 국제법적 지위를 당당히 요구했던 문윤국의 논리 정연한 항변과 일맥상통한다.

일제는 이 두 사람에게 각각 징역 3년과 2년 6개월이라는, 당시 3·1 운동 지도자 33인을 넘어서는 중형을 내렸다. 이는 역설적으로 일제가 두 사람의 정신적 영향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증명하는 훈장이었다.

1920년 3월 1일, 담장을 넘은 함성 

수감 1주년이 되던 1920년 3월 1일, 유관순이 주도한 옥중 만세 운동이 터져 나왔을 때, 서대문형무소는 거대한 함성의 도가니가 되었다. 문윤국 지사 또한 그 뜨거운 대열의 한 축이었다. 벽을 타고 흐르는 타벽 통신은 여사의 만세 소리를 남사로 전달했고, 문윤국은 제자들을 독려하며 차가운 감옥 바닥을 뜨거운 제단으로 바꾸어 놓았다.

순국, 그러나 하나의 길 

1920년 9월, 유관순 열사가 모진 고문 끝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짧고 굵은 생을 마감하며 '독립의 꽃'이 되었을 때, 문윤국 지사는 그 비보를 벽 너머 울음으로 들어야 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붉은 벽돌에는 지금도 두 사람의 숨결이 스며 있다. 100여 년 전, 그들의 간절했던 눈물의 기도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뿌리가 되었음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재판 및 판결 내용 비교

두 분 모두 일제의 사법권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법정에서 당당한 기개를 떨쳤다.

1.  유관순 열사의 법정 투쟁과 판결

법정 태도: "나는 일본 법률의 심판을 받을 죄인이 아니다", "너희가 무슨 권리로 나를 심판하느냐"며 일제의 침략을 규탄했다. 재판 중 검사에게 법당 의자를 던질 만큼 기개가 대단했다.

판결: 1심에서 징역 7년(내란죄 등)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하여 2심에서 징역 3년 확정. (이후 옥중 만세 운동으로 형기가 추가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공식 기록상 3년형 수감 중 순국)

최후: 서대문형무소의 가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1920년 9월 28일 순국.

2. 문윤국 지사의 법정 투쟁과 판결

법정 태도: "나는 죄인이 아니라 전쟁 포로다"라고 주장하며 국제법에 따른 대우를 요구했다. 이는 단순한 저항을 넘어 항일 운동을 '국가 간의 정당한 전쟁'으로 규정한 고도의 논리적 투쟁이었다.

판결: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 선고. 당시 3·1 운동 관련자 중 유관순 열사 등 주동자급에게 내려진 것과 맞먹는 최고 수준의 중형이었다.

최후: 출옥 후 오산학교 재건에 힘쓰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 독립 자금 조달 등에 헌신하다 강원도 정선에서 서거.

감옥을 성전(聖殿)으로 바꾼 신앙

유관순: "하나님, 이 민족을 굽어살피소서"라며 매일 기도했고, 옥중 만세 운동을 주도하며 신앙의 힘으로 고문을 견뎠다.

문윤국: 수감 중 조국의 독립을 하늘에 간구했고 '타벽 통신'으로 성경 구절을 나누며 동지들을 위로했다. 절망적인 감옥을 영적 단련장으로 탈바꿈시킨 점이 일치한다.

교육이 곧 독립이라는 믿음: 이화와 오산이 피워낸 불굴의 꽃

두 사람의 생애는 마치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두 줄기처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유관순 열사가 충남 천안의 매봉교회와 서울의 이화학당을 통해 근대적 신앙과 애국심을 키워냈다면, 문윤국 지사는 평북 정주의 석산교회와 오산학교를 거점으로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일생을 투신했다. 이들에게 독립운동은 단순히 정치적 해방을 넘어, 하나님이 주신 '자유'라는 천부인권을 회복해야만 하는 성스러운 사명이었다.

이러한 신념은 감옥이라는 극한의 공간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앙적 결기로 이어졌다. 유관순 열사가 10대의 순수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자신을 던져 민족의 불꽃이 되었다면, 문윤국 지사는 40대 장년의 원숙한 신앙과 논리적인 투쟁으로 그 불꽃을 체계적인 항쟁의 동력으로 승화시켰다.

특히 재판정에서 보여준 두 사람의 기개는 독립운동사의 전설적인 평행이론을 이룬다

"너희가 무슨 권리로 나를 심판하느냐"며 일제의 침략 사법권을 꾸짖었던 유관순의 서슬 퍼런 호통은, "나는 죄인이 아니라 정당한 전쟁 중에 잡힌 포로이므로 국제법에 따라 처우하라"며 일제의 법리를 정면으로 반박한 문윤국의 항변과 맥을 같이 한다.

일제는 이 두 사람에게 각각 징역 3년과 2년 6개월이라는, 당시 3·1 운동 주동자급 중에서도 이례적인 중형을 선고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일제가 두 사람의 정신적 영향력과 그들이 상징하는 교육적 토양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증명하는 명예로운 훈장이었다.

문윤국 지사가 오산학교에서 길러낸 제자들이 훗날 독립운동의 거목으로 자라났듯, 유관순 열사 또한 이화학당에서 배운 근대적 사고를 민족 자각의 무기로 삼았다. 서대문형무소라는 차갑고 어두운 공간에서, 두 분이 벽 너머로 공유했을 뜨거운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의례를 넘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경건하고도 치열했던 '영적 전쟁'의 현장이었다.

1920년 3월 1일, 담장을 넘은 함성

수감 1주년이 되던 1920년 3월 1일, 유관순이 주도한 옥중 만세 운동이 터져 나왔을 때, 서대문형무소는 거대한 함성의 도가니가 되었다. 문윤국 지사 또한 그 뜨거운 대열의 한 축이었다. 벽을 타고 흐르는 타벽 통신은 여사의 비명 섞인 만세 소리를 남사로 전달했고, 문윤국은 제자들과 동지들을 독려하며 차가운 감옥 바닥을 뜨거운 제단으로 바꾸어 놓았다.

서대문의 어둠을 뚫고, 상해의 등불을 향해 

1921년 가을, 마침내 감옥 문이 열렸다.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지팡이 없이는 걷기조차 힘든 모습이었지만, 문윤국의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주의 산천과 오산학교의 제자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스승을 눈물로 맞이했다.

그는 곧바로 무너진 오산학교를 재건하고, 시무했던 정주군 덕언면의 덕흥교회, 덕산교회, 신안면 연봉교회를 다시 일으키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일제의 가혹한 감시망이 좁혀오자, 그는 마침내 먼저 간 소녀 유관순의 몫까지 짊어진 투사의 기개로 압록강을 건너기로 결심한다.

제8회는 압록강을 넘어 조국의 밤을 밝힐 ‘상해 임시정부’라는 거대한 등불을 향해, 그의 장엄한 망명길이 시작된다.

【企画 連載 独立運動家 文潤国 ⑥】文潤国と柳寛順、鉄窓越しの祈り

【ローカル世界=李勝敏記者】 1919年3月7日、定州のアイポ市場の歓声が静まり返った跡には、日帝の鋭い銃剣が降り下ろされた。隊列の先頭で独立宣言書を獅子吼した文潤国志士は、その場で逮捕され、冷たい鉄窓へと閉じ込められる。それから1921年後半の出獄に至るまで、丸2年6ヶ月、日数にして約910日間に及ぶ獄中の死闘は、それ自体がもう一つの巨大な抗日戦争であった。

柳寛順と文潤国、冷たい監獄の壁を隔てた二人の聖徒

1919年秋、西大門刑務所の空気はとりわけ重かった。同年3月、天安のアウネ市場で万歳を叫び捕らえられた17歳の少女・柳寛順と、定州のアイポ市場の挙事を主導した43歳の牧師・文潤国は、同じ塀の中に囚われた収監の同志であった。南舎と女舎に分かれ、互いの顔を合わせることは叶わなかったが、二人は同じ聖書を読み、同じ神に祖国の独立を)祈願する信仰の同伴者であった。

柳寛順が8号房で祈りを捧げ、涙で夜を明かすとき、文潤国は隣接する舎房から壁を叩く「打壁通信」で福音の振動を伝えていた。彼は絶望に沈む同志たちに「闇が深いほど夜明けは近い」と勇気を奮い立たせた。獄中の同志たちにとって、彼は死の恐怖に打ち勝たせる霊的支柱であり、精神的指導者であった。

取調室の冷気の中でも挫けぬ気概

万歳三唱の代償は過酷であった。荒い捕縄に縛られ定州警察署へ護送される瞬間にも、文志士は遅れる弟子たちに向けて「恐れるな、真理は我らを自由にする」という最後の言葉を遺した。

取調室の薄暗い灯火の下、昼夜を問わず自白を強要する日警の軍靴と鞭が全身を襲ったが、文潤国は固く口を閉ざした。背後を問い詰める尋問官に対し、彼はただ一言で応酬した。「背後にあるのは、ただ朝鮮の空と民族の胸中のみである」

「私は罪人ではなく捕虜だ」――堂々たる法廷闘争

裁判廷に立った文潤国志士は、日本の裁判官に向けて堂々と叫んだ。「私は日本法の審判を受ける罪人ではない。国を取り戻そうとする正当な戦争で捕らえられた捕虜にすぎない。私を処罰せんとするならば、国際法に従って処遇せよ」

彼の論理整然とした反論は、日帝の法廷を当惑させた。彼は自らを国権回復戦争の戦士と規定し、日帝の司法権を正面から否定した。結局、彼は保安法および出版法違反の罪目で懲役2年6ヶ月の重刑を言い渡された。これは日帝が、文潤国という人物の持つ影響力をどれほど恐れていたかを防証する結果であった。

信仰で研ぎ澄まされた不屈の独立意志

二人の生涯は驚くほど似通っている。柳寛順が梅峰教会と梨花学堂を通じて近代的な信仰と愛国心を育んだならば、文潤国は定州の石山教会と五山学校を拠点に教育救国運動に身を投じた。彼らにとって独立運動とは、単なる政治的な解放を超え、神が与えられた「自由」という天賦の人権を回復する神聖なる使命であった。

裁判廷での気概もまた、平行理論を成す。「いかなる権利でお前たちが私を審判するのか」と日帝の司法権を叱責した柳寛順の鋭い怒号は、「私は罪人ではなく正当な戦争で捕らえられた捕虜だ」と叫び、国際法上の地位を堂々と要求した文潤国の論理整然とした抗弁と脈絡を同じくする。

日帝はこの二人に対し、それぞれ懲役3年と2年6ヶ月という、当時の3・1運動指導者33人をも上回る重刑を下した。これは逆説的に、日帝が二人の精神的影響力をどれほど恐れていたかを示す勲章であった。

1920年3月1日、塀を越えた歓声

収監1周年を迎えた1920年3月1日、柳寛順が主導した獄中万歳運動が巻き起こったとき、西大門刑務所は巨大な歓声のるつぼと化した。文潤国志士もまた、その熱き隊列の一翼を担った。壁を伝って流れる打壁通信は、女舎の万歳の声を男舎へと伝え、文潤国は弟子たちを鼓舞しながら、冷たい監獄の床を熱い祭壇へと変えてみせた。

殉国、しかし一つの道

1920年9월, 柳寛順烈士が過酷な拷問の末に西大門刑務所で短くも鮮烈な生涯を閉じ、「独立の花」となったとき、文潤国志士はその悲報を壁越しの泣き声として聞かねばならなかった。西大門刑務所歴史館の赤いレンガには、今も二人の息遣いが染み込んでいる。100余年前、彼らの切実なる涙の祈りは、今日我々が享受する自由の根幹となったことを、歴史は証言している。

 裁判および判決内容の比較

東西の司法権を正面から否定し、法廷で堂々たる気概を示した二人の記録である。

1. 柳寛順烈士の法廷闘争と判決

·       法廷態度: 「私は日本法律の審判を受ける罪人ではない」「いかなる権利でお前たちが私を審判するのか」と日帝の侵略を糾弾した。裁判中、検事に向けて法廷の椅子を投げつけるほど、その気概は凄まじかった。

·       判決: 一審で懲役7年を言い渡されたが控訴し、二審で懲役3年が確定。(のちに獄中万歳運動により刑期が追加されたという説もあるが、公式記録上は3年の刑期中に殉国)。

·       最期: 西大門刑務所の過酷な拷問の後遺症により、1920年9月28日に殉国。

2. 文潤国志士の法廷闘争と判決

·       法廷態度: 「私は罪人ではなく戦争捕虜だ」と主張し、国際法に準ずる待遇を要求した。これは単なる抵抗を超え、抗日運動を「国家間の正当な戦争」と規定した高度な論理的闘争であった。

·       判決: 保保安法および)出版法違反の嫌疑で懲役2年6ヶ月を宣告。当時、3・1運動関係者のうち柳寛順烈士ら主謀者級に下されたものに匹敵する最高水準の重刑であった。

·       最期: 出獄後、五山学校の再建に)尽力したのち、日帝の監視を逃れて上海臨時政府へと亡命。独立資金の調達などに献身し、江原道旌善にて逝去。

監獄を聖殿に変えた信仰

·       大いなる祈りの力: 柳寛順は「神よ、この民族を顧み給え」と毎日祈りを捧げ、獄中万歳運動を主導しながら信仰の力で拷問に耐えた。文潤国は収監中、祖国の独立を天に懇願し、打壁通信で聖句を分かち合いながら同志を慰めた。絶望的な監獄を霊的鍛錬の場へと昇華させた点が完全に一致する。

·       教育こそが独立という信念: 柳寛順烈士が忠清南道天安の梅峰教会とソウルの梨花学堂を通じて近代的な信仰と愛国心を育んだならば、文潤国志士は平安北道定州の石山教会と五山学校を拠点に)教育を通じた救国運動に生涯を捧げた。彼らにとって独立運動とは、単なる政治的解放を超え、神が与えられた「自由」という天賦の人権を回復せねばならない神聖なる使命であった。

·       世代を超えた戦闘動力: この信念は、監獄という極限の空間でも決して揺るがない信仰的決意へと繋がった。柳寛順烈士が10代の純粋で熱い情熱をもって自らを投じ、民族の火花となったならば、文潤国志士は40代壮年の円熟した信仰と論理的な闘争により、その火花を体系的な抗争の動力へと昇華させた。

·       並行理論を成す法廷での気概: 「いかなる権利でお前たちが私を審判するのか」と日帝の侵略司法権を叱責した柳寛順の鋭い怒号は、「私は罪人ではなく正当な戦争中に捕らえられた捕虜であるため、国際法に従って処遇せよ」と日帝の法理を正面から反駁した文潤国の抗弁と脈を通ずる。

·       日帝が恐れた教育的土壌: 日帝はこの二人に対し、それぞれ懲役3年と2年6ヶ月という、当時の3・1運動主謀者級の中でも異例の重刑を言い渡した。これは逆説的に、日帝が二人の精神的影響力と彼らが象徴する教育的土壌をどれほど恐れていたかを証明する名誉ある勲章であった。

·       塀を越えて共有された祈り: 文潤国志士が五山学校で育てた弟子たちが、のちに独立運動の巨木へと成長したように、柳寛順烈士もまた梨花学堂で学んだ近代的な思考を民族自覚の武器とした。西大門刑務所という冷たく暗い空間で、二人が壁越しに共有したであろう熱き祈りは、単なる宗教的儀礼を超え、我が独立運動史において最も敬虔でありながらも熾烈であった「霊的戦争」の現場であった。

1920年3月1日、塀を越えた歓声

収監1周年を迎えた1920年3月1日、柳寛順が主導した獄中万歳運動が巻き起こったとき、西大門刑務所は巨大な歓声のるつぼと化した。文潤国志士もまた、その熱き隊列の一翼を担った。壁を伝って流れる打壁通信は、女舎の悲鳴の混ざった万歳の声を男舎へと伝え、文潤国は弟子や同志たちを鼓舞しながら、冷たい監獄の床を熱き祭壇へと変えてみせた。

西大門の闇を切り拓き、上海の灯火に向けて

1921年秋、ついに監獄の門が開いた。過酷な拷問の後遺症により、杖なしでは歩くことすら困難な姿であったが、文潤国の眼差しだけは炯炯と輝いていた。

定州の山河と五山学校の弟子たちは、満身創痍となって帰ってきた師を涙で迎えた。彼は直ちに崩壊した五山学校を再建し、かつて赴任していた定州郡徳彦面の徳興教会、徳山教会、新安面の連峰教会を再び興す苦難の行軍を開始した。

日帝の過酷な監視網が狭まると、彼はついに、先に逝った少女・柳寛順の遺志まで背負った闘士の気概をもって、鴨緑江を渡ることを決意する。

次回、第7回では、鴨緑江を越えて祖国の夜を照らす「上海臨時政府」という巨大な灯火に向けて、彼の壮絶なる亡命の道が幕を開ける。

(つづ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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