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문윤국 ⑥] 문윤국과 유관순, 철창 너머의 기도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4-22 11:18:10

유관순과 문윤국, 차가운 감옥 벽을 사이에 둔 두 성도(聖徒)
취조실의 냉기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기개 
"나는 죄인이 아니라 포로다" – 당당했던 법정 투쟁
신앙으로 벼려낸 불굴의 독립 의지 
문윤국 지사가 출감하여 고향 덕흥교회에서 설교하고 있다. 사진 이승민 기자(당시 상황을 AI로 복원했다).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1919년 3월 7일, 정주 아이포 장터의 함성이 잦아든 자리에는 서슬 퍼런 일제의 총칼이 내려앉았다. 대열의 선두에서 독립선언서를 사자후로 토해냈던 문윤국(文潤國) 지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차가운 철창에 갇히게 된다. 그로부터 1921년 하반기 출옥까지, 만 2년 6개월(약 910일)에 걸친 옥중 사투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거대한 항일 전쟁이었다.

유관순과 문윤국, 차가운 감옥 벽을 사이에 둔 두 성도(聖徒)

 1919년 가을, 서대문형무소의 공기는 유독 무거웠다. 그해 3월,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다 붙잡혀온 17세 소녀 유관순과 정주 아이포 장터의 거사를 이끌었던 43세의 목사 문윤국은 같은 담장 안에 갇힌 수금(囚禁)의 동지였다.

비록 남사와 여사로 나뉘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수는 없었으나, 두 사람은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하나님께 조국의 독립을 간구하던 신앙의 동역자였다. 

유관순이 8호 감방에서 기도하며 눈물로 밤을 지새울 때, 문윤국은 인접한 사방에서 벽을 두드리는 '타벽 통신'으로 복음의 진동을 전하고 있었다.

그는 절망에 빠진 동지들에게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은 멀지 않았다"며 용기를 북돋웠다. 옥중 동지들에게 그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게 하는 영적 지주이자 정신적 스승이었다.

취조실의 냉기 속에서도 꺾이지 않은 기개 

만세 함성의 대가는 혹독했다. 거친 포승줄에 묶여 정주경찰서로 압송되는 순간에도 문 지사는 뒤처진 제자들을 향해 "두려워 마라,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마지막 당부를 남겼다.

취조실의 희미한 불빛 아래, 밤낮없이 자백을 강요하는 일경의 구둣발과 채찍이 온몸을 휘감았지만 문윤국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배후를 묻는 고문관에게 그는 오직 한마디로 응수했다. "배후는 오직 조선의 하늘과 민족의 가슴뿐이다."

"나는 죄인이 아니라 포로다" – 당당했던 법정 투쟁 

재판정에 선 문윤국 지사는 일본 판사를 향해 당당히 외쳤다. "나는 일본 법의 심판을 받을 죄인이 아니다. 나라를 되찾으려는 정당한 전쟁에서 잡힌 포로일 뿐이다. 나를 처벌하려거든 국제법에 따라 하라."

그의 논리 정연한 항변은 일제 법정을 당혹감에 빠뜨렸다. 그는 스스로를 국권 회복 전쟁의 전사로 규정하며 일제의 사법권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결국 그는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죄목으로 징역 2년 6개월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일제가 문윤국이라는 인물이 지닌 영향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방증하는 결과였다.

신앙으로 벼려낸 불굴의 독립 의지 

두 사람의 생애는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유관순이 매봉교회와 이화학당을 통해 근대적 신앙과 애국심을 키웠다면, 문윤국은 정주 석산교회와 오산학교를 거점으로 교육 구국운동에 투신했다. 이들에게 독립운동은 단순히 정치적인 해방을 넘어, 하나님이 주신 '자유'라는 천부인권을 회복하는 성스러운 사명이었다.

재판정에서의 기개 또한 평행이론을 이룬다

"너희가 무슨 권리로 나를 심판하느냐"며 일제의 사법권을 꾸짖었던 유관순의 서슬 퍼런 호통은, "나는 죄인이 아니라 정당한 전쟁에서 잡힌 포로다"라고 외치며 국제법적 지위를 당당히 요구했던 문윤국의 논리 정연한 항변과 일맥상통한다.

일제는 이 두 사람에게 각각 징역 3년과 2년 6개월이라는, 당시 3·1 운동 지도자 33인을 넘어서는 중형을 내렸다. 이는 역설적으로 일제가 두 사람의 정신적 영향력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증명하는 훈장이었다.

1920년 3월 1일, 담장을 넘은 함성 

수감 1주년이 되던 1920년 3월 1일, 유관순이 주도한 옥중 만세 운동이 터져 나왔을 때, 서대문형무소는 거대한 함성의 도가니가 되었다. 문윤국 지사 또한 그 뜨거운 대열의 한 축이었다. 벽을 타고 흐르는 타벽 통신은 여사의 만세 소리를 남사로 전달했고, 문윤국은 제자들을 독려하며 차가운 감옥 바닥을 뜨거운 제단으로 바꾸어 놓았다.

순국, 그러나 하나의 길 

1920년 9월, 유관순 열사가 모진 고문 끝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짧고 굵은 생을 마감하며 '독립의 꽃'이 되었을 때, 문윤국 지사는 그 비보를 벽 너머 울음으로 들어야 했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붉은 벽돌에는 지금도 두 사람의 숨결이 스며 있다. 100여 년 전, 그들의 간절했던 눈물의 기도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뿌리가 되었음을 역사는 증언하고 있다.

재판 및 판결 내용 비교

두 분 모두 일제의 사법권을 정면으로 부정하며 법정에서 당당한 기개를 떨쳤다.

1.  유관순 열사의 법정 투쟁과 판결

법정 태도: "나는 일본 법률의 심판을 받을 죄인이 아니다", "너희가 무슨 권리로 나를 심판하느냐"며 일제의 침략을 규탄했다. 재판 중 검사에게 법당 의자를 던질 만큼 기개가 대단했다.

판결: 1심에서 징역 7년(내란죄 등)을 선고받았으나 항소하여 2심에서 징역 3년 확정. (이후 옥중 만세 운동으로 형기가 추가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공식 기록상 3년형 수감 중 순국)

최후: 서대문형무소의 가혹한 고문 후유증으로 1920년 9월 28일 순국.

2. 문윤국 지사의 법정 투쟁과 판결

법정 태도: "나는 죄인이 아니라 전쟁 포로다"라고 주장하며 국제법에 따른 대우를 요구했다. 이는 단순한 저항을 넘어 항일 운동을 '국가 간의 정당한 전쟁'으로 규정한 고도의 논리적 투쟁이었다.

판결: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 선고. 당시 3·1 운동 관련자 중 유관순 열사 등 주동자급에게 내려진 것과 맞먹는 최고 수준의 중형이었다.

최후: 출옥 후 오산학교 재건에 힘쓰다 일제의 감시를 피해 상해 임시정부로 망명, 독립 자금 조달 등에 헌신하다 강원도 정선에서 서거.

감옥을 성전(聖殿)으로 바꾼 신앙

유관순: "하나님, 이 민족을 굽어살피소서"라며 매일 기도했고, 옥중 만세 운동을 주도하며 신앙의 힘으로 고문을 견뎠다.

문윤국: 수감 중 조국의 독립을 하늘에 간구했고 '타벽 통신'으로 성경 구절을 나누며 동지들을 위로했다. 절망적인 감옥을 영적 단련장으로 탈바꿈시킨 점이 일치한다.

교육이 곧 독립이라는 믿음: 이화와 오산이 피워낸 불굴의 꽃

두 사람의 생애는 마치 하나의 뿌리에서 뻗어 나온 두 줄기처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유관순 열사가 충남 천안의 매봉교회와 서울의 이화학당을 통해 근대적 신앙과 애국심을 키워냈다면, 문윤국 지사는 평북 정주의 석산교회와 오산학교를 거점으로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에 일생을 투신했다. 이들에게 독립운동은 단순히 정치적 해방을 넘어, 하나님이 주신 '자유'라는 천부인권을 회복해야만 하는 성스러운 사명이었다.

이러한 신념은 감옥이라는 극한의 공간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신앙적 결기로 이어졌다. 유관순 열사가 10대의 순수하고 뜨거운 열정으로 자신을 던져 민족의 불꽃이 되었다면, 문윤국 지사는 40대 장년의 원숙한 신앙과 논리적인 투쟁으로 그 불꽃을 체계적인 항쟁의 동력으로 승화시켰다.

특히 재판정에서 보여준 두 사람의 기개는 독립운동사의 전설적인 평행이론을 이룬다

"너희가 무슨 권리로 나를 심판하느냐"며 일제의 침략 사법권을 꾸짖었던 유관순의 서슬 퍼런 호통은, "나는 죄인이 아니라 정당한 전쟁 중에 잡힌 포로이므로 국제법에 따라 처우하라"며 일제의 법리를 정면으로 반박한 문윤국의 항변과 맥을 같이 한다.

일제는 이 두 사람에게 각각 징역 3년과 2년 6개월이라는, 당시 3·1 운동 주동자급 중에서도 이례적인 중형을 선고했다. 이는 역설적으로 일제가 두 사람의 정신적 영향력과 그들이 상징하는 교육적 토양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를 증명하는 명예로운 훈장이었다.

문윤국 지사가 오산학교에서 길러낸 제자들이 훗날 독립운동의 거목으로 자라났듯, 유관순 열사 또한 이화학당에서 배운 근대적 사고를 민족 자각의 무기로 삼았다. 서대문형무소라는 차갑고 어두운 공간에서, 두 분이 벽 너머로 공유했을 뜨거운 기도는 단순한 종교적 의례를 넘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경건하고도 치열했던 '영적 전쟁'의 현장이었다.

1920년 3월 1일, 담장을 넘은 함성

수감 1주년이 되던 1920년 3월 1일, 유관순이 주도한 옥중 만세 운동이 터져 나왔을 때, 서대문형무소는 거대한 함성의 도가니가 되었다. 문윤국 지사 또한 그 뜨거운 대열의 한 축이었다. 벽을 타고 흐르는 타벽 통신은 여사의 비명 섞인 만세 소리를 남사로 전달했고, 문윤국은 제자들과 동지들을 독려하며 차가운 감옥 바닥을 뜨거운 제단으로 바꾸어 놓았다.

서대문의 어둠을 뚫고, 상해의 등불을 향해 

1921년 가을, 마침내 감옥 문이 열렸다. 모진 고문 후유증으로 지팡이 없이는 걷기조차 힘든 모습이었지만, 문윤국의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정주의 산천과 오산학교의 제자들은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스승을 눈물로 맞이했다.

그는 곧바로 무너진 오산학교를 재건하고, 시무했던 정주의 덕흥교회, 덕산교회, 연봉교회를 다시 일으키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했다.

일제의 가혹한 감시망이 좁혀오자, 그는 마침내 먼저 간 소녀 유관순의 몫까지 짊어진 투사의 기개로 압록강을 건너기로 결심한다.

제8회는 압록강을 넘어 조국의 밤을 밝힐 ‘상해 임시정부’라는 거대한 등불을 향해, 그의 장엄한 망명길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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