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연재 문윤국 ⑬] 정치의 소용돌이를 거부하다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5-19 09:34:46
좌우의 대립, 변질된 독립의 순수성에 실망하다
고결한 침묵으로의 위대한 퇴장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1940년대 후반의 서울은 해방의 환희보다 권력의 허기가 지배하는 도시였다. 상해에서, 만주에서, 그리고 국내 감옥에서 나온 수많은 애국지사가 저마다의 전적(戰績)을 훈장처럼 앞세우며 새로운 정부의 요직을 탐했다. 하지만 38선을 넘어 서울에 도착한 문윤국(文潤國)의 눈에 비친 그 풍경은 조국 광복의 완성이라기보다 또 다른 탐욕의 시작이었다.
“문 형, 이제 우리 세상이 왔소.”
서울의 한 주막, 상해 임시정부 시절 생사를 함께했던 옛 동지들이 문윤국을 찾아왔다. 그들은 번듯한 양복 차림에 미군정(美軍政)과의 연줄을 자랑하며 문윤국에게 손을 내밀었다.
“문 형처럼 정주 만세 운동을 이끌고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운 분이 어찌 가만히 계시오? 지금 정부 요직에 형님의 자리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오. 이제 보상을 받아야 하지 않겠소?”
문윤국은 잔에 담긴 거친 막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나직이 입을 뗐다.
“보상이라니...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국가로부터 보상을 바라고 했단 말인가? 나라를 찾은 것 자체가 보상인데, 거기서 무슨 자리를 더 탐한단 말인가.”
동지들은 그의 고지식함을 타박했으나, 문윤국의 눈빛은 정주의 서당에서 글을 읽던 소년 시절처럼 맑고도 매서웠다.
권력의 정점에서 스스로 ‘무명(無名)’을 택하다
당시 정계의 거물이었던 백범 김구와 이승만 등도 문윤국의 존재를 깊이 알고 있었다. 그의 행정 능력과 가문의 배경, 그리고 만주에서의 신망은 신생 국가의 기틀을 잡는 데 큰 자산이었다. 그러나 문윤국은 그들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권력이 주는 화려함 뒤에 숨은 파벌 싸움과 이념의 갈등을 이미 상해 시절에 뼈저리게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독립운동가 문윤국’이라는 외투를 벗어던지기로 했다. 그것은 비겁한 도피가 아니라, 오염된 정치판으로부터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가장 적극적인 ‘거부’였다.
좌우의 대립, 변질된 독립의 순수성에 실망하다
문 지사를 가장 가슴 아쁘게 했던 것은 해방된 조국에서 벌어지는 동지들의 분열이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어 서로에게 핏대를 세우고, 이념이라는 미명 하에 또다시 동포의 피를 요구하는 해방 공간의 야만성은 그가 망명지에서 상상했던 독립국의 모습이 아니었다.
신탁통치 찬반 논쟁으로 동지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어제의 친일파가 오늘의 애국자로 둔갑하는 현실은 참혹했다. 정작 나라를 찾고 나니 권력을 잡기 위해 추악한 암투를 벌이는 세태에 문윤국은 깊은 환멸을 느꼈다.
그가 평생 오산학교와 목회 현장에서 배운 것은 '섬김'과 '희생'이었다. 그는 권력을 탐하는 순간, 자신이 지켜온 신앙의 정절과 독립운동의 순수성이 진흙탕 속에 구르게 될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결한 침묵으로의 위대한 퇴장
문윤국은 자신의 독립운동 기록과 임시정부 시절의 서류들을 하나둘 정리했다. 남들은 그것을 근거로 독립유공자 훈장을 신청할 때, 그는 오히려 그 흔적들을 가슴 깊은 곳에 묻었다.
그는 양복 대신 투박한 무명바지를 입고, 화려한 구두 대신 짚신을 신었다. 서울의 동지들이 권력의 단맛에 취해갈 때, 70세의 문윤국은 홀연히 서울을 떠났다. 그것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결하고도 장엄한 ‘퇴장’이었다.
이제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진 문윤국은, 강원도 정선의 한 화전민 마을에서 ‘문 영감’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생애 마지막이자 가장 위대한 투쟁인 ‘고결한 침묵’을 시작하고 있었다. 권좌 대신 정선의 흙을 선택한 그의 발걸음은 비록 쓸쓸해 보였으나, 역사상 그 어떤 권력자의 뒷모습보다 당당하고 위대했다.
– 계속 –
[기자 메모] 문윤국 선생이 해방 정국의 중앙 정치를 거부하고 정선으로 은둔한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직면했던 도덕적 결단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다. 많은 이들이 해방의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을 때, 그는 스스로 무소유와 은둔을 선택함으로써 독립운동의 대의를 오롯이 지켜냈다. 그의 이 거룩한 퇴장이 있었기에, 훗날 손자 문선명의 사상이 순수한 세계 평화 운동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영적 토양이 마련되었다.
【企画連載 文潤国 ⑬】政治の渦を拒む、「私が望んだのは権座ではない」
【LOCAL世界=李勝敏 記者】 1940年代後半のソウルは、解放の歓喜よりも「権力への飢え」が支配する都市であった。上海から、満州から、そして国内の監獄から出獄してきた数多くの愛国志士たちが、それぞれの戦績を勲章のように誇示し、新政府の要職をむさぼり求めた。しかし、38度線を越えてソウルに到着した文潤国の目に映ったその風景は、祖国光復(独立)の完成というよりは、新たなる貪欲の始まりにすぎなかった。
「文先生、ついに俺たちの世が来たぞ」
ソウルのある酒場、上海臨時政府時代に生死を共にしたかつての同志たちが文潤国を訪ねてきた。彼らは小綺麗なスーツに身を包み、米軍政(美軍政)とのコネを自慢げに語りながら文潤国に手を差し伸べた。
「文兄のように定州の万歳運動を率い、臨時政府の台所を支えた方が、なぜそのように黙っておられる。今、政府の要職に兄さんの席を一つ作ることなど造作もない。もう、報いを受けてもよい頃ではないか」
文潤国は、器に注がれた粗末なマッコリをじっと見つめていたが、静かに口を開いた。
「報いだと……。我々が独立運動をしたとき、国家からの見返りを望んでやったというのか。国を取り戻したこと自体が報いであるのに、そこからさらに何の地位をむさぼるというのだ」
同志たちは彼の分uses(生真面目さ)をなじったが、文潤国の眼差しは、定州の書堂で書を読んでいた少年時代のように 澄み渡り、かつ鋭かった。
権力の頂点で、自ら「無名」を選ぶ
当時、政界の巨頭であった白凡金九や李承晩らも、文潤国の存在を深く認識していた。彼の卓越した行政能力、家柄の背景、そして満州での人望は、新生国家の礎を築く上で大いなる資産であった。しかし、文潤国は彼らの招聘に応じなかった。権力がもたらす華려さの裏に潜む派閥争いやイデオロギーの葛藤を、すでに上海時代に骨の髄まで目撃していたからである。
彼は自ら「独立運動家・文潤国」という上着を脱ぎ捨てることにした。それは卑怯な逃避ではなく、汚濁に満ちた政治の世界から自身の信念を守り抜くための、最も積極的な「拒絶」であった。
左右の対立、変質した独立の純粋さに失望する
文潤国を最も深く傷つけたのは、解放された祖国で繰り広げられる同志たちの分裂であった。昨日の同志が今日の敵となり、互いに血気を荒立て、理念という大義名分の下に再び同胞の血を求める解放空間の野蛮さは、彼が亡命先で思い描いた独立国家の姿ではなかった。
信託統治の賛否をめぐる論争で同志たちが互いに銃を向け合い、昨日の親日派が今日の愛国者に様変わりする現実は凄惨を極めた。せっかく国を取り戻したというのに、権力を握るために醜い暗闘を繰り広げる世相に、文潤国は深い幻滅を覚えた。
彼が終生、五山学校や牧会の現場で学んだものは「仕えること」と「犠牲」であった。権力をむさぼった瞬間、自分が守り抜いてきた信仰の貞節と独立運動의純粋さが泥沼にまみれることを、彼は誰よりもよく知っていた。
高潔なる沈黙への、偉大なる退場
文潤国は、自身の独立運動の記録や臨時政府時代の書類を一つひとつ整理した。他人がそれを根拠に独立功労者の勲章を申請するとき、彼はむしろその足跡を胸の奥深くへと埋め込んだ。
彼はスーツの代わりに無骨な木綿の衣服をまとい、華やかな革靴の代わりに草鞋を履いた。ソウルの同志たちが権力の甘い蜜に酔いしれていく中、70歳の文潤国は忽然とソウルを去った。それは、韓国現代史において最も高潔で、かつ厳かな「退場」であった。
こうして歴史の表舞台から姿を消した文潤国は、江原道 旌善の、ある火田民の村で「文じいさん」と呼ばれながら、自身の生涯最後にして最も偉大な闘争である「高潔なる沈黙」を始めていた。権座の代わりに旌善の土を選んだ彼の足取りは、たとえ寂しげに見えたとしても、歴史上のいかなる権力者の後ろ姿よりも堂々として、また偉大であった。
(つづく)
【記者メモ】 文潤国先生が解放政局の中央政治を拒み、旌善へと隠遁した事件は、韓国現代史において独立運動家たちが直面した道徳的決断を示す、最も象徴的な場面である。多くの人々が解放の戦利品を手にしようと血眼になっていたとき、彼は自ら無所有と隠遁を選択することで、独立運動の大義を清らかに守り抜いた。この気高い退場があったからこそ、後年、孫である文鮮明の思想が純粋な世界平和運動へと広がっていくための、大いなる精神的土壌が育まれたのである。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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