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①] 문선명과 김대중의 특별한 동행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 2026-01-04 15:02:20

문선명과 김대중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종교·정치 거목'의 만남
고난의 시기 맺은 인연
남북 화해의 핫라인으로 승화 
민주화 망명 시절부터 사후 예우까지
30년 넘는 '신뢰와 실용'의 궤적
문선명과 김대중. 1989년 2월 세계일보 창간 리셉션 참석한 당시 김대중 평화민주당 제1야당 총재 시절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한국 현대사의 거목인 고(故) 문선명 통일교 총재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DJ). 각각 종교와 정치라는 서로 다른 영역에서 정점에 섰던 두 인물은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마다 독특한 접점을 형성하며 '국익'과 '평화'라는 공통의 가치를 향해 손을 맞잡았다.

■ 망명 시절 싹튼 유대감… "고난 겪은 지도자의 공감대"

두 사람의 인연은 1980년대 김대중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군사 정권으로부터 탄압받던 김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한국의 민주화 상황을 알리는 데 주력했고, 이 과정에서 통일교 측 인사들과 직간접적인 교류를 맺었다.

특히 통일교 내 대외 협력을 주도하던 박보희 총재 등은 김 전 대통령의 안전 확보와 구명 활동에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두 인물 모두 옥고와 탄압이라는 극한의 시련을 겪었다는 점은 서로에 대한 '지도자적 연민'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됐다.

문 총재가 설립한 '워싱턴 타임스(The Washington Times)' 역시 중요한 매개체였다. 망명 시절에는 한국 인권 문제를 비중 있게 다뤄 미국 내 여론 형성을 도왔고, 재임 시절에는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을 미국 보수층에 설득하는 전략적 통로로 활용되기도 했다.

■ '햇볕정책'의 든든한 우군, 민간 대북 핫라인 가동

두 사람의 관계가 가장 빛을 발한 지점은 대북 정책이었다. 1991년 김일성 주석과 단독 회담을 하며 강력한 대북 네트워크를 구축했던 문 총재는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 햇볕정책의 실질적인 파트너 역할을 수행했다.

▶ 남북 경협의 상징: 정경분리 원칙에 따라 북한 남포에 설립된 '평화자동차'는 남북 경제 협력의 기념비적 사례가 됐다.

▶ 민간 외교의 물꼬: 1998년 '리틀엔젤스 예술단'의 평양 공연은 남북 문화 교류의 숨통을 틔웠다.

▶ 비공식 채널: 정부 차원의 공식 라인이 경색될 때마다 통일교 측이 보유한 대북 핫라인은 남북 관계의 가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당시 여권 실세였던 김경재 전 의원 등이 소통 창구로 활동하며 양측의 신뢰를 공고히 했고, 김 대통령은 통일교의 대북 사업이 긴장 완화에 기여함을 공식 인정하며 주요 행사마다 축전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 "역사가 기록한 예우"… 사후까지 이어진 신의

1999년 세계일보 창간 10주년 기념식에 김대중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문 총재 내외와 케이크를 자르는 모습은 두 사람의 각별한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으로 남았다.

문 총재 내외와 케이크를 자르는 모습.

이러한 예우는 사후에도 계속됐다. 2009년 김 전 대통령 서거 시 문 총재는 깊은 애도를 표하며 조문단을 파견했고, 이듬해 통일교 측은 '세계평화 지도자 성화축제'에서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DJ를 공식 추모 대상자로 선정해 영정을 모셨다.

이어 2012년 문 총재가 별세했을 당시, 김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가 조화를 보내 화답한 것은 30여 년에 걸친 두 가문의 신뢰와 존중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문선명 총재와 김대중 전 대통령의 관계는 '실용주의적 국익'과 '고난을 극복한 지도자 간의 상호 존중'이 결합된 독특한 형태였다. 종교와 정치라는 경계를 넘어 한반도 평화라는 큰 뜻 아래 협력했던 두 거목의 발자취는 오늘날 남북 관계와 민간 외교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한다.

손을 맞잡은 한학자 총재와 김대중 대통령.

LOCAL 세계 / 이승민 기자 happydoors1@gmail.com

이하는 기사 원문 일본어 번역

【新年特集①】文鮮明総裁と金大中大統領、その類まれなる同行

[LOCAL 世界 = 李勝敏 記者] 韓国現代史の巨頭である故・文鮮明 世界平和統一家庭連合総裁と、故・金大中 元大統領。

宗教と政治という、それぞれ異なる領域の頂点に立った二人の巨星は、激動する韓国現代史の節目ごとに独特な接点を形成し、「国益」と「平和」という大義に向けて緊密に公助した。

■ 亡命時代に芽生えた絆…「辛酸をなめた指導者たちの共鳴」

二人の縁は、1980年代の金大中元大統領による米国亡命時代にまで遡る。当時、軍事政権の弾圧下にあった金元大統領は、米国で韓国の民主化の実情を訴える活動に注力しており、その過程で家庭連合側の関係者と直・間接的な交流を持つこととなった。

特に、教団内で対外協力を主導していた朴普熙 総裁らは、金元大統領の身辺安全の確保や救命活動に実質的な寄与を果たしたとされる。二人が共に「獄中生活」と「弾圧」という極限の試練を乗り越えてきたという事実は、互いに対する指導者としての深い敬意と連帯感を醸成する礎となった。

文総裁が創刊した「ワシントン・タイムズ(The Washington Times)」も重要な媒介となった。亡命期には韓国の人権問題を大きく報じて米国内の世論形成を後押しし、大統領在任期には金大統領の「太陽政策(包容政策)」を米国の保守層に説得するための戦略的チャネルとして活用された。

■ 「太陽政策」の強力な後援者、民間の対北ホットラインを稼働

二人の関係が最も真価を発揮したのは、対北朝鮮政策においてであった。1991年に金日成 主席との単独会談を経て強固な対北ネットワークを構築していた文総裁は、金大中政権の発足後、太陽政策の質実剛健な民間パートナーとしての役割を全うした。

▶ 南北経協の金字塔: 「政経分離」の原則に基づき北朝鮮・南浦(ナンポ)に設立された「平和自動車」は、南北経済協力の歴史的な象徴となった。

▶ 民間外交の活路: 1998年の「リトルエンジェルス芸術団」による平壌公演は、膠着していた南北文化交流の突破口を開いた。

▶  非公式チャネルの威力: 政府間の公式ルートが遮断されるたびに、家庭連合側が保持する対北ホットラインは、南北関係を繋ぎ止める架け橋として多大な貢献を果たした。

■ 「歴史が刻んだ礼遇」…死後まで貫かれた信義

1999年、世界日報創刊10周年の記念式典に金大中大統領が自ら出席し、文総裁夫妻と共に祝賀のケーキカットを行う姿は、二人の格別な親交を象徴する場面として歴史に刻まれている。

こうした礼遇は、両氏の死後も途絶えることはなかった。2009年に金元大統領が逝去した際、文総裁は深い哀悼の意を捧げ弔問団を派遣。翌年、教団側は「世界平和指導者聖和祝祭」において、歴代大統領の中で唯一、金元大統領を公式な追悼対象として遺影を安置した。

さらに2012年に文総裁が逝去した際には、金元大統領の夫人である李姫鎬 女史が供花を贈り、その誠意に応えた。これは、30年余にわたる両家の信頼と尊重を端的に示す一幕である。

文鮮明総裁と金大中元大統領の関係は、「実利的な国益」と「苦難を克服した指導者間の相互敬愛」が結びついた稀有な形であった。宗教と政治の壁を越え、朝鮮半島の平和という大義の下に共闘した二人の足跡は、今日の南北関係における民間外交の重要性を改めて問いかけている。

LOCAL 世界 / 李勝敏 記者 happydoors1@gmail.com

[ⓒ 로컬(LOCAL)세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WEEKLY H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