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세계는 예측 가능한 울타리 안에 있었다. 미국 중심의 질서와 자유무역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한 세계는 그 울타리가 허물어진 불안정한 무극화 시대다. 세계의 균형을 잡던 축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자국 이익만을 쫓는 각자도생의 문법만이 남았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안미경중(安美經中)의 공식이 힘을 잃고 냉혹한 정글의 법칙이 시작된 것이다. 이 변화는 단순한 경제 지표의 하락보다 뼈아픈 현실이다.
미·중 패권 경쟁은 체제와 가치의 전쟁으로 격상되었고, 양국은 우리에게 명확한 선택을 강요한다. 공급망 블록화와 자원 민족주의 속에서 반도체는 전략 자산이 되었고, 에너지는 타국을 굴복시키는 칼날이 되었다. 지정학적 요충지에 위치한 우리에게 각자도생은 더 이상 선택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을 건 필사의 준비이며, 국제정세 불안정으로부터 자유로운 고도의 정치적·기술적 역량을 확보하는 일이다. 나아가 통합적이고 체계적인 냉철한 판단은 머뭇거림 없는 실행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는 냉혹한 정글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길은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뿐이다. 강대국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게 만드는 힘, 그것은 바로 우리만의 초격차 첨단 기술이다.
우리가 밤새워 밝히는 연구소의 불빛은 나라를 지키는 견고한 국경선이며, 세계가 우리를 함부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방패다. 반도체, 차세대 배터리, AI, K-방산의 기술력은 우리의 전략적 자율성을 지탱하는 기술적 급소(Chokepoint)다. 이 불빛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인재들을 모으고 보상받는 토양을 구축하여 미래 과학 기술 자본을 지켜내야 한다. 국제 사회의 파고가 높아질수록 한 사회의 내부 결속은 더욱 중요해진다.
세계가 각자도생을 외치며 등을 떠밀 때, 우리는 오히려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다가오는 폭풍을 직시해야 한다. 거센 바람은 약한 풀잎을 쓰러뜨리지만, 강한 나무는 그 바람을 견디며 불필요한 가지를 쳐내고 몸통을 키운다. 지금 한국 경제가 마주한 현실도 다르지 않다. 소모적인 내부 갈등에 에너지를 허비할 여유는 없다. 국가적 생존이라는 더 큰 목표 아래 정부와 기업, 시민이 하나의 팀으로 움직일 때,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이라는 삼중의 압박을 완화할 수 있다. 이는 급변하는 국제질서 속에서 외교적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돌이켜보면 시련을 넘어, 더 깊은 뿌리를 내린, 한국의 역사는 단 한순간도 평탄한 적이 없었다. 자원 없는 좁은 땅에서 우리는 늘 벼랑 끝에 서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벼랑 끝에서 추락하는 대신 하늘로 솟아오르는 법을 택했다. 가난의 바람 속에 교육이 우뚝 섰고, 탄압의 바람 속에서 민주주의의 뿌리를 내렸다. 역사 속 조상들의 혼이 깃든 우리에게 국제 질서의 거대한 폭풍은 또 다른 도약의 기회일 뿐이다.
우리는 이를 계기 삼아 기술 주권과 안보 자강의 뿌리를 더욱 깊고 단단하게 내리고, 더 밝은 미래를 향해 막연한 기대치가 아닌 실질적으로 키워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수많은 시련 속에서 단련된 강인함과 영리함, 그리고 뜨거운 열정을 지닌 국민이다. 비바람은 거세지만, 우리는 그 바람을 이용해 역풍(逆風)을 순풍(順風)으로 바꿀 줄 아는 지혜를 가졌다. 지금 우리를 휘감는 불안은 머지않아 우리가 써 내려갈 새로운 기적의 서막이다. 대한민국은 언제나 그래왔듯 길을 찾을 것이고, 만약 길이 없다면 우리가 함께 그 길을 만들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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