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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손영종은 고구려가 진나라와 국경을 접하기 위해서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 이전에 고구려가 건국되어야 한다고, 건국 연도를 기원전 277년으로 설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손영종이 같은 논문에 기원전 222년에 연나라가 멸망하고 기원전 221년부터 진나라는 고조선과 국경을 접했다고 써 놓고도 고구려와 진나라가 직접 국경을 접했을 것이라는 가정의 틀에 사로잡혀 오류를 범한 것이다.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진・한의 동북쪽에 있었다는 기록 하나만 가지고도, 진나라가 기원전 221년에서 기원전 206년까지 존재했는데 고구려가 그 동북쪽에 있었다는 것은 고구려 건국 연도를 소급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생각이 고구려와 진나라가 국경을 마주했었을 것이라는 자신만의 설정으로 발전해서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진・한의 동북쪽에 있었다고 한 기사는 고구려의 지리적인 위치가 진・한의 동북쪽이라는 것이지 고구려가 진・한과 국경을 마주했었다는 기록으로 보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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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고조선과 진국의 영역 |
본 칼럼 10회에서 '삼국지'「동이전」의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분할하여 한사군을 설치했다’라는 기록과 함께 [그림 1]을 통해서 살펴보았듯이, 한사군 설치 이전에는 위만조선의 동쪽 국경과 고구려 서쪽 국경이 접하였으므로 고조선 멸망 이전의 고구려는 중국왕조와 서쪽 국경을 직접 접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3세손이 대를 이어 왕이 된 여달・여율・막래 3명을 찾았다고 하면서도 누락시킨 왕의 재위 연수를 구하기 위해서 굳이 5세손 왕 10명의 재위 연수를 합산한 것 역시 모순이다. 3세손 3명의 왕과 애루왕을 찾았다고 했는데, 애루왕이 3세손 3명 왕 중 1명과 세손이 같을 경우, 5세손 10명 왕의 재위 연수를 모두 합산하는 것은 찾아낸 3세손을 제외한 나머지 2세손 왕의 재위 연수를 산출하기 위해서 6명 왕의 재위 연수를 합산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3세손 3명 왕 중 애루왕과 같은 세손이 없다면 4세손을 찾은 것으로, 6명의 왕 재위 연수를 합산하여 1세손 왕의 재위 연수를 산출하는 것은 커다란 모순이다. 더더욱 5세손 10명의 왕 재위 연수를 모두 합산해서 '삼국사기'에서 누락시킨 왕들의 재위 연수를 추정할 것이었다면, 굳이 누락된 왕들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기록에서 누락시킨 왕들을 찾은 이유는 그들의 관계 등을 분석하여, 초기 왕 중 몇 명의 재위 연수를 합산해서 삭감된 연도를 추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손영종은 '삼국사기'에 5세손이 누락됐다고 했고, 일각에서는 4세손을 누락시켰다지만, 누락된 세손이 모두 즉위했었다는 보장도 없다. 어느 왕조든 초기에는 권력 판도에 의해서 왕좌가 움직였다.
고구려만 해도 '삼국사기'의 기록 그대로 의존해서 살펴보면, 모본왕은 아버지 대무신왕으로부터 직접 왕위를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삼촌인 민중왕이 대무신왕의 뒤를 이어 5년 동안 짧게 재위하고 죽자 민중왕의 왕위를 물려받았을 뿐만 아니라, 모본왕도 재위 6년이라는 짧은 기간 후에 죽임을 당하고 왕위를 빼앗긴다. 이것만 보아도 왕위 세습 규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해서 세손을 건너뛰었을 수도 있다는 것으로, 세손에 얽매이기보다는 누락시킨 왕을 최대한 찾아서 그 명수만큼 초기 왕의 재위 연수를 합산하여 삭감된 연도를 추정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손영종은 고구려 건국 연도가 기원전 277년이 되면 멸망한 668년까지 945년을 존립하여 유국 900년 설에 가깝다고 했으나, 역사를 논할 때 945년이면 900년이 훨씬 지났다거나 1,000년에 가깝다고 하지 900년에 가깝다고 하지는 않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본다. (다음 호에 계속)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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