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기도회 "대통령을 위해 기도합시다"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1970년대 초반, 전 세계를 뒤흔든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정치사뿐만 아니라 종교사에도 중요한 변곡점을 남겼다. 그 중심에는 위기에 처한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통일교 창시자 문선명 총재가 있었다. 두 사람의 조우는 단순한 개인적 친분을 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미국 보수 정치권과 종교 세력 간 결합의 시초가 되었다.
위기의 닉슨을 구하라
문선명 총재가 워터게이트로 퇴진 위기에 몰린 닉슨 대통령을 지지하고 나선 배경에는 강렬한 '승공주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문 총재는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자유 진영의 보루인 미국의 리더십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1973년, 문 총재는 미국 주요 일간지에 "용서하라, 사랑하라, 단결하라(Forgive, Love, Unite)"라는 슬로건으로 대대적인 광고를 게재하며 국민적 구명 운동을 펼쳤다. 또한 '국민기도금식위원회'를 조직해 미국 전역에서 집회를 열며 닉슨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에 응답하듯 닉슨 대통령은 1974년 2월 1일, 문 총재를 백악관으로 초청해 20여 분간 단독 면담을 가졌고, 문 총재는 그에게 "끝까지 책임감을 갖고 자리를 지키라"고 격려했다.
워싱턴 타임스와 레이건 행정부
닉슨의 사임 이후, 통일교의 활동은 정치적 방어를 넘어 언론적 토대를 닦는 계기가 되었다. 1982년 창간된 워싱턴 타임스(The Washington Times)는 그 결정체였다. 당시 리버럴한 언론 지형 속에서 보수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시작한 이 매체는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의 강력한 우군이 되었다.
레이건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이후 고사 위기였던 보수주의를 이 신문이 살렸다"고 극찬했으며, 워싱턴 타임스는 레이건의 전략방위구상(SDI)을 적극 지지하며 냉전 승리의 이념적 도구 역할을 수행했다.
한·미·일 삼각 보수 동맹의 언론적 교량
이러한 영향력은 미국 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문 총재가 구축한 네트워크는 '그레이터 워싱턴'을 넘어 동북아시아로 확장되었다.
레이건 행정부의 아침 신문
워싱턴 타임스는 레이건 대통령이 매일 아침 가장 먼저 읽는 신문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규정한 레이건의 대외 정책과 전략방위구상(SDI, 일명 스타워즈 계획)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며 냉전 종식을 앞당기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종교 우파와의 결합과 정치적 유대
신학적 차이를 넘어 '가족 가치 수호'와 '반공'을 매개로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 세력 및 보수 정치 연합(CPAC)과 긴밀히 협력했고 조지 H.W. 부시 대통령 등 공화당 핵심 인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며 보수 싱크탱크를 지원했다.
동북아 네트워크
미국의 워싱턴 타임스, 한국의 세계일보, 일본의 세카이니포(세계일보)와 함께 한·미·일 삼각 보수 동맹을 뒷받침하는 언론적 기반이 되었다.
프레이저 청문회와의 투쟁
1970년대 후반, 미 의회(프레이저 소위원회)는 통일교와 한국 정부의 유착 관계를 조사하며 문 총재를 압박했다. 문 총재는 이를 오히려 '종교 탄압'이자 '보수 세력 죽이기'로 역이용하며 미국 보수 기독교인(복음주의자)들을 결집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문선명 총재와 리처드 닉슨 대통령 사이의 관계는 단순한 정치적 지지를 넘어, 극적인 에피소드들로 가득 차 있다.
1. "대통령을 위해 기도합시다" – 금식기도회
1973년 말,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의 탄핵 여론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다. 문 총재는 미국 전역에서 '국민기도금식 위원회'를 조직했다. 통일교 신도들은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앞에서 닉슨을 지원하기 위해 3일(72시간) 동안 금식 기도를 올렸다. 당시 "God Loves Nixon(신은 닉슨을 사랑한다)"이라는 피켓을 든 젊은 신도들의 모습은 미국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며 충격을 주었다.
사면초가에 몰려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던 닉슨에게 문 총재의 방문은 큰 위로가 되었다. 닉슨은 훗날 회고록 등에서 당시 문 총재의 지지가 심리적으로 큰 버팀목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2. "용서하라, 사랑하라, 단결하라" 광고 투하
문 총재는 자신의 사비와 교단 자금을 들여 뉴욕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 내 100여 개 주요 일간지에 전면 광고를 냈다.
광고의 핵심 메시지는 "인간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대통령의 실수보다 국가의 분열이 더 무섭다"는 논리였다. 이는 당시 '법치주의'를 강조하던 미국인들에게 '종교적 용서'라는 파격적인 프레임을 제시한 사건이었다.
3. 닉슨의 퇴진과 '워싱턴 타임스'의 탄생으로 이어진 유산
닉슨은 결국 1974년 8월 사임했다. 문 총재는 닉슨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이후 미국 자유주의 언론과 정치권으로부터 거센 공격(프레이저 청문회 등)을 받게 된다. 이에 문 총재는 "보수주의자의 목소리를 대변할 강력한 언론이 필요하다"고 절감했고, 이는 훗날 1982년 워싱턴 타임스 창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워싱턴 타임스는 매년 개최되는 미국 최대의 보수 행사인 보수정치행동회의(CPAC)의 주요 후원 및 파트너 역할을 하며, 현재까지도 공화당 주류 인사들의 목소리를 전파하는 핵심 채널로 작동하고 있다.
역사적 평가
결국 문선명과 닉슨의 만남은 한 개인의 구명 운동에서 시작되어, 미국 내 보수주의의 재건과 전 세계적인 승공 블록 형성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결과물로 이어졌다. 닉슨은 정치적으로 실패했으나, 그를 지지하며 구축된 시스템(워싱턴 타임스 등)은 오늘날까지도 한·미·일 보수 동맹의 강력한 언론적 기반으로 살아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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