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난희(南蘭喜) 가이드의 해설로 되짚은 6·25의 비극… 흥남철수의 생명 구출부터 백마고지 혈전과 정전까지
[로컬세계 = 글·사진 이승민 대기자] 가을 문턱에 들어선 9월 9일,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을 찾은 일본 평화통일연합 회원들이 6·25전쟁의 기록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모국을 방문한 이들은 전쟁으로 희생된 수많은 사람과 흩어진 가족들의 사연을 마주하며 평화의 소중함을 되새겼다.
이날 안내를 맡은 남난희(南蘭喜) 여행 가이드는 해박한 역사 지식을 바탕으로 전쟁 발발부터 낙동강 방어전, 인천상륙작전,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를 거쳐 정전에 이르는 과정을 차분하게 설명했다. 전투의 승패와 전선의 이동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희생된 장병과 민간인의 삶도 함께 짚었다.
전시된 철모와 탄피, 빛바랜 기록 앞에서 전쟁은 더 이상 연도와 지명만으로 기억되는 역사가 아니었다. 전장에 쓰러진 병사도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피란길에 오른 사람도 가족과 함께 평범한 내일을 꿈꾸던 이웃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군은 38도선을 넘어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전면전에 대비해 군사력을 갖추고 공격해 온 북한군에 맞서 국군은 병력과 장비의 열세 속에서 방어에 나서야 했다. 개전 사흘 뒤인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됐고, 전쟁의 참화는 빠르게 남쪽으로 번졌다. 논밭을 돌보고 생업을 이어가던 사람들의 일상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피란길에서는 수많은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잠시 몸을 피했다가 돌아오려던 길은 기약 없는 이별로 이어졌고, 고향에 남겨 둔 부모와 형제를 다시 만나지 못한 채 평생을 보낸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낙동강까지 밀려난 국군과 유엔군은 치열한 방어전 끝에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이어 1950년 9월 15일 감행된 인천상륙작전과 뒤이은 낙동강 전선의 반격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서울을 수복하고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면서 전쟁이 끝날 수 있다는 기대도 커졌다. 그러나 중국군의 개입으로 전황은 다시 급변했다.
이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들이 바다를 건너 조국을 구하러 온 재일학도의용군이다. 일본에서 생활하던 청년과 학생 642명은 병역 의무가 없었음에도 학업과 생업을 뒤로하고 자원 참전했다. 국가보훈부 자료에 따르면 이들 가운데 52명이 전사하고 83명이 행방불명됐다. 조국을 지키겠다는 결심으로 나선 여정은 어떤 이들에게는 끝내 돌아올 수 없는 길이 됐다.
살아남은 이들에게도 시련은 이어졌다. 265명은 일본으로 돌아갔지만, 242명은 일본의 재입국 거부로 가족이 기다리는 삶의 터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조국을 위해 싸운 뒤에도 이들은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했다.
1950년 겨울, 장진호에서는 미 제1해병사단과 육군 병력 등이 혹한과 중국군의 포위 속에서 사투를 벌였다. 가까스로 포위망을 벗어난 병력은 흥남으로 철수했고, 항구에는 군인들뿐 아니라 전쟁을 피해 남쪽으로 가려는 주민들도 몰려들었다. 흥남철수는 병력과 장비를 옮기는 군사작전이자 수많은 민간인의 생사가 걸린 구출작전이었다.
해상과 공중의 엄호 아래 병력 약 10만 5천 명과 차량 약 1만 7천500대, 대량의 군수물자가 배에 실렸다. 군은 방어선을 단계적으로 축소하며 철수를 진행했고, 한정된 선박 공간에 피란민을 함께 태우기 위한 노력도 이어졌다.
그 가운데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항해는 오늘날까지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기억된다. 레너드 라루 선장과 선원들은 약 1만 4천 명의 피란민을 태우고 흥남을 떠났다. 제대로 된 숙소도, 충분한 편의시설도 없는 화물선이었지만 사람들은 서로에게 의지하며 바다를 건넜다. 항해 중에는 다섯 아기가 태어났고, 피란민들은 거제도에 무사히 내렸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들려온 새 생명의 울음은 전쟁도 끝내 꺾지 못한 희망이었다.
유엔군사령부는 흥남·원산·성진에서 이뤄진 해상 철수를 통해 구출된 민간인이 약 9만 8천 명이라고 설명한다. 12월 24일 마지막 부대가 흥남을 떠나면서 철수작전은 마무리됐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 목숨을 구한 사람들에게도 이별의 고통은 남았다. 남쪽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뒤에도 마음 한편에는 두고 온 가족과 돌아가지 못한 고향 집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흥남에서 마지막 배가 떠난 뒤에도 전쟁은 계속됐다. 새해에도 중국군과 북한군의 공세가 이어졌고,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에서 다시 철수했다. 이른바 ‘1·4후퇴’였다. 서울을 되찾은 지 몇 달 만에 시민들은 다시 피란 보따리를 꾸려야 했다. 전쟁은 이들에게서 또다시 삶의 터전을 빼앗았고, 사람들은 겨울 추위 속에서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남쪽으로 향해야 했다.
국군과 유엔군은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섰다. 1951년 2월 지평리 전투에서는 미 제2보병사단 제23연대와 이에 배속된 프랑스대대가 중국군의 포위 공격을 버텨 냈다. 이 전투는 중국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유엔군이 반격을 이어가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이어 국군과 유엔군이 3월 15일 서울을 다시 수복하면서 전선은 점차 38도선 부근으로 북상했다.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이후 회담 장소는 판문점으로 옮겨졌지만, 군사분계선 설정과 포로 송환 등을 둘러싼 대립으로 협상은 길어졌다. 전쟁을 멈추기 위한 회담이 열리는 동안에도 전선의 포성은 그치지 않았다.
전쟁의 양상도 달라졌다. 남북으로 크게 오르내리던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고, 산봉우리와 능선을 차지하기 위한 고지쟁탈전이 이어졌다. 지도 위에서는 작은 지점에 불과한 고지가 장병들에게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방어 거점이었다. 협상장에서 논의되는 경계선에는 그 땅을 지키다 쓰러진 이들의 희생이 어려 있었다.
그 참혹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전투가 백마고지 전투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철원 북방의 395고지에서 국군 제9사단은 중국군 제38군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 철원평야를 확보하고 중부전선 방어에 유리한 위치를 지키기 위한 격전이었다.
국가기록원에 따르면 백마고지에서는 열흘 동안 12차례의 쟁탈전이 벌어졌고, 고지의 주인이 일곱 차례 바뀌었다. 김종오 사단장이 지휘한 제9사단 장병들은 치열한 공방 끝에 고지를 지켜냈다. 이 승리로 국군은 철의 삼각지대의 한 축인 철원 지역을 계속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승리라는 말만으로 그 전투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고지를 사수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장병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전투 기록에 남은 부대명과 작전명 뒤에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한 청춘들이 있었다. 백마고지는 국군의 투혼을 증명한 이름인 동시에, 전쟁이 멈추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됐는지를 되묻게 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1953년 7월에는 정전을 눈앞에 두고도 금성지구에서 중국군의 대규모 공세가 벌어졌다. 국군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전열을 수습하고 반격에 나서 전선을 안정시켰다. 정전 직전까지 전투가 계속됐다는 사실은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 희생을 돌아보게 한다.
마침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협정에 따라 그날 오후 10시부터 적대행위가 중지됐다. 3년 넘게 한반도를 뒤흔든 전면전은 멈췄지만, 평화협정에 따른 완전한 종전에 이른 것은 아니었다.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고 비무장지대가 설정되면서 분단은 굳어졌다.
총성이 멎은 뒤에도 전쟁은 사람들의 삶에 남았다. 돌아오지 않은 아들을 기다리는 부모, 헤어진 가족의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이산가족, 부상과 상실을 안고 살아간 참전용사, 일본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재일학도의용군 모두에게 전쟁의 아픔은 계속됐다. 정전은 포격을 멈추게 했지만, 헤어진 가족들을 다시 만나게 해 주지는 못했다.
전쟁기념관을 나서는 길, 평화통일연합 회원들은 남난희 가이드의 해설을 통해 전황의 변화 너머에 있는 희생의 무게를 되새겼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일상을 빼앗긴 사람들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운 이들의 삶은 하나의 역사 속에 맞닿아 있었다. 낙동강에서 버텨 낸 장병들, 바다를 건너온 재일동포 청년들, 흥남에서 피란민을 구한 사람들, 정전 직전까지 고지를 지켰던 병사들의 헌신이 그 역사를 지탱하고 있었다.
이날 견학은 평화가 얼마나 절실한 과제인지를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침략의 역사를 바르게 기억하고 나라를 지킨 이들의 헌신을 기리며, 전쟁으로 희생된 이들을 애도하고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힘을 모으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의 몫이다. 전쟁기념관에 남은 기록들은 그 책임을 조용히 일깨우고 있었다.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銃声はやんでも、痛みは残る…平和統一聯合の会員ら、ソウル・龍山の戦争記念館を訪問
北朝鮮の奇襲南侵によって奪われた日常、戦場に散った若者たち
南蘭喜ガイドの解説でたどる朝鮮戦争の悲劇…興南撤収による人命救出から白馬高地の激戦、休戦まで
[LOCAL 世界 = 李勝敏 特派員] 秋の訪れを感じさせる9月9日、ソウル・龍山の戦争記念館を訪れた日本の平和統一聯合の会員らが、朝鮮戦争の記録を前に足を止めた。朝鮮半島の平和と統一を願って母国を訪れた一行は、戦争で犠牲となった多くの人々や、離れ離れになった家族の物語に触れ、平和の尊さを改めて胸に刻んだ。
この日、案内を務めた南蘭喜ガイドは、豊富な歴史知識をもとに、開戦から洛東江防衛戦、仁川上陸作戦、長津湖の戦いと興南撤収を経て休戦に至るまでの経緯を、丁寧に説明した。戦闘の勝敗や戦線の移動だけでなく、その過程で犠牲となった将兵や民間人の人生にも目を向けた。
展示された鉄帽や薬莢、色あせた記録を前にすると、戦争はもはや年号や地名だけで記憶される歴史ではなかった。戦場に倒れた兵士も誰かの息子であり、避難の途についた人も、家族とともに平穏な明日を夢見ていた隣人だった。
1950年6月25日未明、北朝鮮軍は38度線を越え、奇襲南侵を開始した。全面戦争に備えて軍備を整え、攻め込んできた北朝鮮軍に対し、韓国軍は兵力と装備で劣勢に立たされながら防衛に当た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開戦から3日後の6月28日にソウルが陥落し、戦火は急速に南へと広がった。田畑を耕し、生業を営んでいた人々の日常は、一瞬にして崩れ去った。
避難の途上では、多くの家族が離れ離れになった。一時的に身を避けて戻るつもりだった避難が、再会の見通しもない別れとなり、故郷に残した父母や兄弟姉妹に二度と会えないまま生涯を終えた人も少なくなかった。
洛東江まで押し下げられた韓国軍と国連軍は、激しい防衛戦の末に北朝鮮軍の進撃を食い止めた。続いて1950年9月15日に決行された仁川上陸作戦と、その後の洛東江戦線での反撃によって戦局を逆転させた。ソウルを奪還し、38度線を越えて北進するにつれ、戦争終結への期待も高まった。しかし、中国軍の介入によって戦況は再び急変した。
この歴史を語るうえで欠かせないのが、海を渡り、祖国を救うために駆けつけた在日学徒義勇軍である。日本で暮らしていた青年や学生642人は、兵役義務がなかったにもかかわらず、学業や仕事を後にして志願参戦した。韓国国家報勲部の資料によると、このうち52人が戦死し、83人が行方不明となった。祖国を守るという決意で踏み出した旅は、ある者にとっては、ついに帰ることのできない道となった。
生き残った者たちにも試練は続いた。265人は日本へ戻ったが、242人は日本への再入国を拒否され、家族が待つ生活の拠点に帰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祖国のために戦った後も、彼らは家族と離れて暮らさ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
1950年冬、長津湖では米第1海兵師団や陸軍部隊などが、厳寒と中国軍の包囲の中で死闘を繰り広げた。ようやく包囲網を脱した部隊は興南へ撤退し、港には軍人だけでなく、戦火を逃れて南へ向かおうとする住民も押し寄せた。興南撤収は、兵員や装備を移送する軍事作戦であると同時に、多くの民間人の生死が懸かった救出作戦でもあった。
海上と上空からの援護のもと、約10万5,000人の兵員と約1万7,500台の車両、大量の軍需物資が船で運び出された。軍は防衛線を段階的に縮小しながら撤収を進め、限られた船内の空間に避難民も乗せようとする努力を続けた。
なかでも、米国の商船メレディス・ビクトリー号の航海は、今日まで「クリスマスの奇跡」として語り継がれている。レナード・ラルー船長と乗組員は、約1万4,000人の避難民を乗せて興南を出港した。十分な居住設備もない貨物船だったが、人々は互いに支え合いながら海を渡った。航海中には5人の赤ん坊が生まれ、避難民は巨済島に無事上陸した。死の恐怖の中で響いた新たな命の産声は、戦争でさえ打ち砕くことのできなかった希望だった。
国連軍司令部によると、興南・元山・城津からの海上撤収で救出された民間人は約9万8,000人に上る。12月24日、最後の部隊が興南を離れ、撤収作戦は完了した。しかし、故郷を離れて命を救われた人々にも、別れの苦しみは残った。南で新たな生活を始めた後も、心の片隅には、残してきた家族と帰ることのできない故郷の家が、いつもあった。
興南から最後の船が去った後も、戦争は続いた。年が明けても中国軍と北朝鮮軍の攻勢はやまず、韓国軍と国連軍は1951年1月4日、再びソウルから撤退した。いわゆる「1・4後退」である。ソウル奪還からわずか数カ月で、市民は再び避難の荷物をまとめ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戦争は人々から再び暮らしの場を奪い、人々は冬の寒さの中、幼い子どもの手を引いて南へ向かった。
韓国軍と国連軍は態勢を立て直し、反撃に出た。1951年2月の砥平里の戦いでは、米第2歩兵師団第23連隊と同連隊に配属されたフランス大隊が、中国軍の包囲攻撃に持ちこたえた。この戦闘は中国軍の攻勢を食い止め、国連軍が反撃を続ける重要な契機となった。続いて韓国軍と国連軍が3月15日にソウルを再奪還すると、戦線は次第に38度線付近まで北上した。
1951年7月10日、開城で休戦会談が始まった。その後、会談の場所は板門店へ移されたが、軍事境界線の設定や捕虜送還などをめぐる対立によって交渉は長期化した。戦争を止めるための会談が開かれている間も、前線の砲声はやまなかった。
戦争の様相も変わった。南北に大きく動いていた戦線は膠着状態に陥り、山頂や尾根をめぐる高地争奪戦が続いた。地図上では小さな一点にすぎない高地も、将兵にとっては命を懸けて守るべき防衛拠点だった。交渉の場で論じられる境界線には、その土地を守って倒れた者たちの犠牲が刻まれていた。
その凄惨さを物語る代表的な戦闘が、白馬高地の戦いである。1952年10月6日から15日まで、鉄原北方の395高地で、韓国軍第9師団は中国軍第38軍の攻撃に立ち向かった。鉄原平野を確保し、中部戦線の防衛に有利な位置を守るための激戦だった。
韓国国家記録院によると、白馬高地では10日間に12回の争奪戦が繰り広げられ、高地を占領する側が7回入れ替わった。金鍾五師団長が指揮する第9師団の将兵は、激しい攻防の末に高地を守り抜いた。この勝利によって韓国軍は、「鉄の三角地帯」の一角をなす鉄原地域を引き続き確保することができた。
しかし、勝利という言葉だけで、この戦闘のすべてを語ることはできない。高地を死守する過程で、多くの将兵が命を落とし、あるいは負傷した。戦闘記録に残る部隊名や作戦名の背後には、家族のもとに帰れなかった若者たちがいた。白馬高地は韓国軍の闘魂を示す名であると同時に、戦争が止まるまでにどれほど多くの命が犠牲になったのかを問いかける名でもあった。
1953年7月には、休戦を目前にしながらも、金城地区で中国軍の大規模な攻勢が展開された。韓国軍は大きな打撃を受けたが、態勢を立て直して反撃し、戦線を安定させた。休戦直前まで戦闘が続いたという事実は、最後の瞬間まで重ねられた犠牲を振り返らせる。
ついに1953年7月27日、休戦協定が締結された。協定に従い、同日午後10時から敵対行為が停止された。3年以上にわたって朝鮮半島を揺るがした全面戦争は止まったが、平和協定による完全な終戦に至ったわけではなかった。軍事境界線が引かれ、非武装地帯が設けられ、分断は固定化していった。
銃声がやんだ後も、戦争は人々の人生に残った。帰らぬ息子を待つ親、離れ離れになった家族の生死さえ分からない離散家族、傷や喪失を抱えて生きた参戦勇士、日本にいる家族のもとへ帰れなかった在日学徒義勇軍。その誰にとっても、戦争の痛みは続いた。休戦は砲撃を止めたが、離れ離れになった家族を再会させてはくれなかった。
戦争記念館を後にする平和統一聯合の会員らは、南蘭喜ガイドの解説を通じて、戦況の変化の向こうにある犠牲の重みを改めて胸に刻んだ。北朝鮮の奇襲南侵で日常を奪われた人々と、国を守るために戦った人々の人生は、一つの歴史の中でつながっていた。洛東江で持ちこたえた将兵、海を渡ってきた在日同胞の青年、興南で避難民を救った人々、休戦直前まで高地を守った兵士たち。その献身が、この歴史を支えていた。
この日の見学は、平和がいかに切実な課題であるかを見つめ直す時間となった。侵略の歴史を正しく記憶し、国を守った人々の献身をたたえ、戦争の犠牲者を悼み、同じ悲劇を繰り返さないために力を合わせること。それは、今日を生きる私たちに託された務めである。戦争記念館に残された記録は、その責任を静かに問いかけ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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