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마리아님! 이 다리를 빼게 도와주십시오. 저는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 신부가 돼 영혼을 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5년 5월8일 유고슬라비아에서 소련군에 포로로 잡힌 독일 공군 소속의 안톤 트라우네르는 이듬해인 1946년 봄 유고슬라비아 내륙 경사진 벌목장에서 나무를 끌고 내려오던 중 다리가 통나무에 깔린 채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이때 안톤 트라우네르는 성모 마리아님께 도와 달라고 기도를 한 뒤 젖먹던 힘까지 다 쏟은 결과 기적같이 다리를 빼낼 수 있었다.
이 독일군이 훗날 천주교 신부가 된 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땅에 와서 빈민구제와 교육사업에 반세기 이상을 매진한 하 안토니오(90·한국식 이름) 몬시뇰이다.
현 파티마 세계사도직(푸른군대) 한국본부장인 하 몬시뇰은 1948년 12월까지 3년8개월에 걸친 소련군 포로시절 벌목장 사건 등 서너 차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다. 이때의 극한적 경험이 후에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한국행을 결심하고, 한국에 와서도 성공적인 신부 생활을 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줬다.
1922년 10월14일 독일 베르팅겐에서 태어난 그는 1941년 고교 졸업 직후 독일 공군 통신병으로 입대했다가 소련군에 포로로 붙잡혔다. 8일 동안 먹지도 못한 채 도보행진을 하는 등 참혹한 포로생활을 해야 했다. 수차례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독·러 포로교환을 통해 구사일생으로 살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어머니와 마을주민들의 뜻에 따라 1949년 3월 딜링겐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우여곡절 끝에 1958년 4월27일 사제 서품을 받은 그는 한국에 가기로 결심했다.
하 몬시뇰은 1958년 7월5일 부산항에 도착했다. 천주교 부산교구 중앙성당에 거처를 정한 뒤 독일어를 하는 한 대학생으로부터 1년여 동안 한국어 공부를 했다. 이듬해인 1959년 10월 신부가 없던 부산 남구 우암동 동항성당에 주임신부로 공식 부임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하 몬시뇰은 부임 직후 우선 빈민구제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당시 우암동 일대에는 전국에서 몰려든 피란민들이 수만명 살고 있었는데 모두 너무 가난하니까 집집이 돌아다니며 미군 원조품인 옥수수와 밀가루, 독일에서 보내온 옷 등 구호품을 나눠주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 몬시뇰은 이때 길거리를 배회하던 소아마비 소녀와 맹인 소년 등 7명을 사제관으로 데려와 한방에서 자며 직접 키웠다. 1960년대 초에는 독일 어느 공장에서 보내온 재봉틀 10대를 밑천으로 무료 학원을 만들어 주부들을 모아놓고 봉제교육을 실시, 훗날 한국이 봉제기술 강국이 되는 단초를 제공했다.
하 몬시뇰은 교육사업에도 열정을 보였다. 독일에서 한국의 참담한 상황을 전하며 각계각층의 지원을 이끌어내 1965년 3월 성당 뒤편 여유 부지에 한독여자실업학교(현 부산문화여고)를 설립, 본격적인 교육활동에 들어갔다. 현재 전교생이 800여 명인 이 여고는 당시 학생이 몰려들어 전교생에 2000명에 달했다.
한독실업학교 졸업생 중 매년 100여 명이 독일에 간호사로 취업을 떠나 외화벌이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하 몬시뇰은 또 독일에 있던 어머니 가로리나(1971년 7월 타계) 여사가 1963년 전 재산을 팔아 보내준 약 3억원으로 지하 1층, 지상 4층짜리 대형 교육관(사랑의 집·현재 마리아피정센터로 개칭)을 건립했다.
하 몬시뇰은 1977년 교회조산원을 설립, 1993년 문을 닫을 때까지 2만6000여 명의 신생아 출산을 도왔다.
파티마 세계사도직 관계자는 “1970~80년대는 정부 차원에서 아이 1명 낳기 운동을 벌이던 때로 각 가정이 아이 낳는 게 부담스러운 시기였다”며 “조산원 설립은 파격적인 것으로 지금 돌아보면 선구자적인 방침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하 몬시뇰은 1979년 2월 연임 제한에 걸려 20년 동안 시무한 동항성당 주임신부직을 사임한 뒤 현재는 성심수녀회와 푸른군대 한국본부장직에 전념하고 있다. 교회일치운동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매년 5월 임진각을 찾아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회를 열고 있다. 매년 10월 천주교 전국 성당에서 한반도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기도회를 여는 것도 하 몬시뇰의 영향이다.
하 묜시뇰은 “얼마 남지 않은 제 마지막 여생의 계획은 북한과 러시아를 회개시키는 것인데 그 첫 작업으로 임진각에 파티마 성모 순례성당을 짓는 것”이라며 “이미 부지 1000평을 임진각 인근에 구입했으며 수련원을 겸한 성당을 신축, 북한에 하나님과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전하는 전초기지로 삼겠다”며 활짝 웃었다.
로컬부산 = 맹화찬 기자 a5962023@segye.com

특별인터뷰 _ 하 안토니오 몬시뇰 신부
- 기사입력 2012.03.09 (금)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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