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전국농민회’ 결성 고달픈 농민 목소리 대변
정부의 주먹구구식 농업정책 농가 경제부담만 가중
쌀값 하락 부추기는 재고쌀 대북지원으로 소진해야[로컬세계] “농민이 맘 편히 땅을 일굴 수 있도록, 농민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농민운동의 역할이죠. 인간인 농민의 존엄성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민주화운동과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죠. 민주화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자주적인 농민조직이 태동하고 체계를 갖춰 발전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이광석(59)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에게 농민운동은 ‘농민이 제자리에 있게 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광석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의장은 1970년대 말, 가톨릭·기독교 농민회로 대표되던 종교중심의 농민운동이 활발하던 때 농민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다.
“1973년 결혼 이후 전북 군산에서 가업을 물려받아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죠. 당시는 국가 주도로 농업이 육성되던 시기로, 농업·농촌·농민을 위한 정책보단 농민의 희생을 담보로 한 농업정책이 주를 이뤘습니다. 농업정책을 만들고 시행하는 공무원이나 농협 직원들조차 농민을 밑으로 보던 때였으니까요. 1979년 전주지역 가톨릭농민회에 입회하면서부터 농업·농촌 문제가 개인이 아닌 사회 전반의 문제란 것을 깨닫기 시작했죠”
1980년대 민주화운동이 절정에 다다르던 때 여러 단위로 분산 전개되던 농민운동 역시 자주적인 조직으로 거듭나려던 움직임이 일었다. 1987년 전농의 전신인 ‘민주쟁취국민운동 전국농민위원회’가 결성되고, 1990년 전농이 조직되면서 현재 9개 도연맹 100개 시·군이 참여하는 자주적 농민조직으로 성장했다.
이 과정에서 이 의장은 군산농민회 창립멤버로 활동했다. “당시 성당에서 창립총회를 준비하는데, 계속해서 외압이 들어왔죠. 농민이 농민답게, 지속가능한 농업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농민 자주’를 외치던 것만으로도 탄압하던 때였으니까요. 경찰력에 둘러싸여 밤을 지새우는데 덥고 있던 이불이 요동 칠 정도로 위기감에 떨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농민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 신앙, 함께 해온 동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 가톨릭농민회에서 전주교부 회장, 전북연합회 부회장 등을, 전농 군산농민회장 등을 역임하며 지역단위 농민운동에 매진하던 이 의장이 전국으로 활동영역을 넓힌 것은 2003년 11기, 12기 전농 전북도연맹 의장을 연임하던 때다.
당시 전농은 민주노동당과 연합해 정치세력화를 꾀하던 시기다. “전농 대의원대회에서 농업정책을 수립하는데 있어서 농민의 의견을 효과적으로 반영될 수 있게끔 정치세력화를 결정했죠.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여러 성향의 농민운동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인물들이 필요했죠. 여러 번 사양했지만 전북도연맹 의장을 맡게 된 것도 융화에 적합한 인물이란 주변의 평가가 크게 작용했죠”
지난 1월 이 의장은 13기 전농 의장에 선출됐다. ‘융화’로 대변되는 이 의장의 성향이 13기 의장 선출에서도 크게 작용한 덕이다. 그러나 이 의장의 양 어깨는 무겁다. 농업·농촌 현장이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상황에서 지금까지 농민운동을 이끌어온 이들의 활동까지 제약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농업 현장에 있는 농민운동가의 부채가 수억원부터 수십억원에 달합니다. 매년 부채에 의지해 농사를 지어야 하는 우리네 농민들의 현주소죠. 경제적 어려움은 이들이 농민운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있습니다. 약화된 조직력을 복원하고 지속가능한 농업 발전에 열의를 가진 농민운동가들을 포용해야 하는 것이 지금 전농이 해야 할 일이죠”
어느 때보다 현장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농민들의 이야기가 큰 틀 안에서 모아질 수 있도록 신뢰를 쌓아가겠다는 이 의장을 만나 우리나라 농업의 현주소를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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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농 활동의 성과는
우리나라 농업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계속되는 수입자유화·개방농정으로 농업이 피폐해지는 상황에서도 농업의 희망을 찾기 위한 활동을 계속해왔다.
농업에 대한 대안을 지속적으로 제기하며 농업을 희생물로 삼는 각종 자유무역협정(FTA)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농산물가격안정, 농가부채, 농협 개혁 활동 등 농민생존권을 지켜내기 위한 활동도 농업을 지키기 위한 일이다.
특히 농업이 농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 국민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어왔다. 식량주권에 대한 인식을 확산시키고 있는 것도 그 성과 가운데 하나다.
▲친환경농업·농산물우수관리제도(GAP) 등 농산물의 부가가치를 높이려는 정부정책의 득과 실은
정부는 친환경농업·GAP 등으로 농산물의 급을 나누어 가격경쟁을 유도한다. 현재의 친환경농업은 고투입 친환경농업이다. 한마디로 친환경비료나 농약을 쓰는 것을 친환경농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로 인해 농민들의 생산비 부담은 더욱 커지고 있다. 정부가 말하는 친환경농업의 개념보다는 지속가능한 환경친화적 농업을 육성해야 한다. 현재의 농업생산방식을 바꾸어가며 단계적으로 환경친화적 농업을 만들어가기 위한 정책적 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더욱더 필요하다고 본다.
외국에서는 인증제도가 아닌 관리시스템 개념으로 사용하는 GAP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마치 인증제도인 것처럼 국민들에게 얘기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GAP는 이력추적이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농약과 화학비료 사용을 가능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
▲값비싼 농기계를 농가에 임대해 주는 ‘농기계은행’이 현장에서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높은데
농림수산식품부의 농기계은행사업 취지인 농기계 구입에 따른 농가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농가에 필요한 농기계가 구비되지 않는 상황이다 보니 어려움이 더 많다.
특히 농기계 사용이 영농철에 집중되다보니 웬만한 개수의 농기계를 보유하고서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 실정이다. 농기계은행사업 비리도 시시때때로 터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사업에 대한 더욱 체계적인 설계가 필요하다고 본다. -
▲생산지와 소비지 간 농산물 가격편차가 심화되는 등 농산물 유통과정의 문제점이 크다
연일 소비자 물가가 상승하고 있지만 농민들의 실질적인 삶은 나아지고 있지 않다. 농민들의 농가 수취가격은 낮아지고, 유통상인들의 이익만 늘어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통과정에 대한 단속이 필요하다. 특히 모든 농산물이 서울로 집중됐다가 다시 지역으로 내려가는 식의 유통과정은 커다란 문제다. 각 지역의 특성을 반영한 먹을거리 생산·공급체계를 수립하고 지역 내에서 선ㄴㄴ순환 유통이 이뤄질 수 있도록 방안이 마련돼야 한다. -
▲학교 친환경무상급식에 대한 국민요구가 높다
친환경무상급식은 농민과의 연결고리가 깊다. 전농을 비롯한 8개 농민단체가 소속된 농민연합도 ‘친환경무상급식추진위원회’를 구성해 활발한 논의를 진행중이다.
친환경무상급식은 어린 시절부터 우리 농산물로 급식을 함으로써 우리 농산물의 소중함을 인식시킬 수 있는 교육적 차원에서 중요하다.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함으로써 지역 먹을거리 체계를 만드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지속가능한 환경친화적농업으로 단계적인 전환을 유도할 수 있는 다양한 논의를 바탕으로 친환경무상급식 실현을 위한 정책이 입안되고 집행돼야 할 것이다. -
▲이상기온과 잦은 비로 과수농가 냉해가 커지면서 생계까지 위협받고 있는데
현재 소비자물가 상승으로 많은 이들이 체감하는 부분이다. 전농이 올 초부터 제기했듯이 이상저온 현상은 단기적인 것이 아니다. 장기적인 피해를 가져올 수밖에 없으며, 특히 과수농사는 새로 시작하면 적어도 3년이라는 시간이 걸리는 만큼 그 피해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현재 과수농가의 피해에 대한 정부차원의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지난 봄 시설농가를 중심으로 피해조사만 진행했을 뿐이다. 그에 따른 보상금도 말 그대로 ‘쥐꼬리’일 뿐이다. 그러다보니 경남 진주·하동 등 일부 지역에서는 영농손실보상금을 반납하는 투쟁들이 벌어지기도 했다.
농업은 국가의 식량주권을 지키는 일이다. 따라서 국가차원의 농업재해보상법 등이 제정될 필요가 있다. 이상기후 문제를 농업재해보험 형식으로 민간에 떠넘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더욱이 농업재해보험은 농가부담 비율이 높다보니 가입률도 낮은 것이 사실이다.
작물피해뿐 아니라 소득피해까지 산정해 농민들의 융자나 자부담 비율을 최소화하는 지원이 필요하다. -
▲쌀 재고 급증 문제가 올 수확기에도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대북지원으로 이를 해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게 제기되고 있는데
공식발표에 따르면 현재 쌀 재고량은 149만톤에 이른다. 이는 적정재고량의 2배가 넘는 양이다. 재고미 급증은 쌀값하락의 원인이 돼 현재 쌀값이 10만원대 아래로 내려간 상황이다.
재고미 급증에 따른 쌀값 급락은 2008년 이명박 정권 들어 대북 쌀 지원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연간 평균 40만톤에 달하던 대북 쌀 지원이 2년이나 중단되다 보니 그만큼의 양이 재고미로 쌓이게 된 것이다.
정부는 쌀 문제를 단지 수급 측면에서 보고 농민들이 너무 많이 생산해서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수급의 불균형을 가져온 것도 정부 양곡정책의 실패다.
쌀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우선 대북 쌀 지원을 즉각 재개해 재고미를 소진해야 한다. 재고미를 대북지원 방식으로 완전히 시장에서 격리한 후에 쌀 수급대책을 세워야만 한다.
정부 양곡정책의 전면적인 검토와 설계도 필요하다. 단지 쌀 수급에만 초점을 맞춰 감산에 중심을 둘 것이 아니라 식량자급이라는 큰 밑그림을 그리고 그에 걸맞은 단기·중장기 양곡정책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농협법 개정·신경분리 등 바람직한 농협개혁을 위한 입장은
농협개혁의 핵심은 협동조합으로서의 정체성 회복이다. 거대 권력화된 농협중앙회를 농민조합원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이다.
농민들은 오랜 기간 농협의 신용사업과 경제사업을 분리할 것을 요구했다. 농협이 은행업무를 중심으로 한 신용사업으로 돈벌이만 할 것이 아니라 농산물의 생산·유통 등 경제사업을 중심에 두고 농민조합원들의 이해와 요구를 실현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난 수십년 간의 농민 요구와는 달리 현재 농협의 사업구조 개편안이나 정부의 농협법 개정안은 모두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근본부터 흔드는 ‘지주회사’ 방식의 신경분리를 제시하고 있다.
협동조합은 협동조합다워야 한다. 농협법 개정과 농협 신경분리는 협동조합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논의되고 추진돼야 한다. 더욱이 농민조합원·농협조직원들과 논의나 합의 없이 진행되는 정부의 농협법 개정안은 철회돼야 한다. -
▲지난해 말 기준 농가부채가 31조4000억원에 이른다. 심각해지는 농가부채 해결을 위한 선결과제는
농가부채 현황은 조사기준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통계청에서 발표하는 자료는 표본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실제 부채는 더욱 많을 수 있다. 지난해 강기갑 민주노동당 의원 발표에 따르면 농가부채는 42조원을 육박한다.
이처럼 정부는 농가부채의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농가부채의 규모가 얼마인지 알아야 제대로 된 농가부채 대책을 세울 수 있지 않나. 더욱 심각한 것은 농가부채 연체율이 증가하고, 이로 인한 신용불량자들이 늘어간다는 것이다.
농가부채의 근본 해결책은 농민들이 농사로 소득을 보장받고 그것으로 빚을 탕감할 수 있도록 농산물의 제값을 보장하는 것이다. 농사를 지어도 생산비조차 보장되지 않다보니 오히려 부채가 늘어가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현재 시급한 것은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던 ‘농가부채동결법’을 즉각 제정하고 이를 통해 농가부채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다. 농가부채동결법은 현재의 농가부채를 동결시키고 20년 거치 후 부채를 상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한다. -
▲우리나라 농업·농촌의 지속 발전을 위한 제언 한마디
지금 농민의 삶은 한마디로 ‘구도자의 삶’이다. 농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생계유지조차 어려워서야 되겠는가. 국민의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민들을 살릴 수 있는 근본적인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 국민이 원하는, 국민이 필요로 하는 먹을거리를 농민들이 생산할 수 있는 체계가 마련돼야 한다.
이를 위한 정책이 마련되고 효과적으로 시행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농민운동가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농사꾼으로서 농민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지속가능한 농업을 만드는 것은 우리 농민의 몫이다.
국민과의 효과적인 소통 창구를 만들어 끊임없이 농업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체계적인 발전상을 제시하는데 전농이 앞장서겠다.
뉴스룸 = 이진욱 기자 jinuk@segye.com
- 기사입력 2010.09.26 (일) 23:05, 최종수정 2010.09.26 (일)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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