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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용수 이사장. |
1945년 8월 15일 광복의 기쁨도 잠시,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 대장 로마넨코와 남한에 들어온 미군대장 하지는 각기 자기 측 색깔에 맞는 정치 지도자를 지원했으며 정치적 세력 규합에 혈안이 된 좌우 세력들은 겉으로는 민족분열을 걱정하면서도 극단적 좌우 대립으로 갈등을 조장하는 데 혈안이 됐다.
건국준비위원회를 내세운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가 공산주의 집단에 가깝다고 이를 반대하던 송진우도 극우와 극좌 세력의 총칼에 쓰러지고 좌우 합작통일을 외치던 김 구 주석도 살해당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분단 극복의 소망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반도 분단의 틀을 고착시키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1950년 6월 25일, 한반도 적화통일 야욕에 혈안이 된 북의 김일성이 소련과 중국의 지원 하에 남침을 감행함으로써 남과 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아물 수 없는 상처를 안고 반세기가 넘도록 분단의 벽을 허물지 못한 채 대치하고 있다.
지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남북한 간 민간교류는 물론 정부 간의 대화가 잦아지고 인적.물적인 교류 확대로 점차 협력과 공존의 관계를 넓혀오다가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해 긴장이 고조됐으나 남북 모두가 시장경제 확대전략과 대남혁명 전략을 버리고 ‘우리는 한 민족’이라는 순수한 민족적 소명감을 가지고 서로 한 발씩 다가가 껴안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본다.
스위스가 중립국으로서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평화를 유지해 오고 있는 것이나 오스트리아가 점령군을 철수시키고 통일국가를 이룩한 데 있어서 중요시했던 핵심 요소는 다양한 계층의 정치적 욕구가 ‘국가의 이익’을 해치는 선을 넘지 않았다는 점이다.
스위스가 살아남기 위한 갖가지 방안 가운데 영세중립을 선택한 것이나 오스트리아가 점령국들의 통치 하에서 그것도 막강한 소련의 방해를 극복하고 1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통일 독립국가를 완성해 국제연합에 가입하고 오늘날 선진국으로서 당당히 유럽연합(EU)의 일원이 돼 있는 것을 볼 때, 이들 두 나라는 분단의 현실에서 통일의 길을 향해 달리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좋은 사례로서 교훈 삼을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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