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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손영종은 '북사(北史)'「열전」「고구려」와 '위서(魏書)'「열전」「고구려」의, ‘주몽이 죽자 아들 여달이, 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이, 여율이 죽자 아들 막래가 왕이 되어 부여를 정벌했다’라는 기록과 ‘광개토대왕릉비’에 ‘추모왕의 뒤를 이어 유류왕이 왕업을 이어받았고, 대주류왕이 왕업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라는 기록을 인용하면서 '삼국사기'에 하나의 왕 휘(諱)나 묘호(廟號)가 두 개 이상으로 기록된 것을 찾아 고구려 역사를 삭감하기 위해서 누락시킨 5세손의 왕 중 네 명을 찾았다고 하면서 고구려 건국 연도를 재설정했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유리왕」에 ‘이름은 유리인데 유류라고도 한다’라는 것은 유리왕과 유류왕(여달), 그리고 통치 기간이 짧았던 여율왕을 혼합하여 기록한 것이고, '삼국사기'「고구려본기」「대무신왕」에 ‘대무신왕은 대해주류왕이라고도 한다’라는 것은 대무신왕과 대주류왕(막래)을 혼합하여 기록한 것이다.
또한 '삼국사기'「고구려본기」「모본왕」에 ‘모본왕의 이름은 해우(解憂) 또는 해애루(解愛婁)라고도 한다’라고 한 것은 애루왕이 모본왕과 혼합되어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이렇게 고구려 초기 역사를 삭감하여 건국 연도를 늦춘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에서 누락시킨 5세손의 왕 중에서 유류왕, 여율왕, 대주류왕, 애루왕 이렇게 4명의 왕은 찾고 나머지는 찾지 못했으나, 찾지 못한 왕을 포함한 재위 연수는 유리왕부터 5세손에 이르는 동천왕까지 10명의 왕 재위 연수를 합산해서 추정할 수 있다.
10명 왕의 재위 연수는 267년이므로 37년+267년=304년으로, 기원전 304년경에 고구려가 건국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고구려가 진・한의 동북쪽에 있었다고 했으며, 고구려 건국을 기록한 역사서들은 한결같이 고구려가 갑신년에 건국되었다고 했다.
따라서 고구려가 진나라와 직접 국경을 접하기 위해서는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기원전 221년 이전의 갑신년에 건국되어야 하므로, 기원전 277년과 기원전 337년 중 하나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기원전 337년은 기존의 기원전 37년과 차이가 너무 많이 나고, 기원전 277년이면 고구려가 945년 동안 존립한 것이 되어 유국 900년 설과도 가까우니 고구려는 기원전 277년에 건국된 것이다’라고 했다.
손영종은 이 논문에서 아주 좋은 접근 방법을 선택해서 논리적으로 잘 풀어나가다가 마지막 건국 연도 설정 과정에서 마치, 시장에서 물건값을 흥정하듯이 추정하는 커다란 오류를 범한다.
그는 '삼국사기'에 고구려가 진・한의 동북쪽에 있었다고 한 기사에 대해서, 고구려의 지리적인 위치가 진・한의 동북쪽이라는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진・한과 국경을 마주했었다는 기록으로 오인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진(기원전 221년~기원전 206년) 나라와 국경을 마주해야 했었다는 커다란 오류를 범함으로써,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던 논문에서 논리적인 사고가 흔들린 것이다. 고구려가 갑신년에 건국되었다는 것만을 내세우며 기원전 337년과 기원전 277년 두 개를 놓고 고구려 건국 연도를 추정하는 과정에서 어떤 논리적인 이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원전 337년은 '삼국사기'의 기록인 기원전 37년과 300년이 차이가 남으로써 차이가 너무 많이 나고, 5세손의 통치 연간이 세손별로 60년이 되어 너무 길뿐만 아니라 유국 900년 설과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기원전 277년으로 설정하면 세손별 통치 기간도 48년으로 적당하고,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까지는 945년을 존속한 것이 되어 유국 900년 설과도 가까우니 적당하다는 것이다.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 생각에 맞춰 흥정하는 것처럼 설정하면 안 된다. 그렇게 흥정하듯이 설정하다가 자칫 잘못하면 역사를 왜곡하는 불씨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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