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1학기(1973. 7. 11.) 때 제적
인생·우주 근본 다룬 ‘통일교, 원리말씀’에 심취·대자각
아프리카 세네갈, 코트디부아르 등 국내외 40여년 선교·목회
가정연합 창시자 문선명·한학자 총재 양위분 1995년 코트디부아르 모셔 ‘왕중왕(王中王) 대관식’거행
47년 만인 2020. 7. 17. 대학측 ‘3학년 복학’ 승인
2021~2022년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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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연합 원로목사인 김수용(78)씨가 입학 59년 만에 졸업장을 받은 지난 24일 아내 윤금주(73)씨와 함께 사학과 졸업식장이 마련된 부산대 재료관 1층 로비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로컬세계 부산=글·사진 전상후 기자] “대학 입학 59년 만에 졸업장을 받아드니 그동안 맺혔던 향학의 한이 풀리고, 꿈만 같습니다.”
지난 24일 오전 11시 부산대학교 재료관(제2공학관) 1층 소강당, ‘인문대 사학과 2023졸업식’이 열리고 있었다.
졸업생들 틈 속에서 한 분의 노 신사가 눈에 띄었다. 인문대 사학과 1964학번 김수용(78·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부산교구교회 원로목사)씨가 손자뻘 되는 동료들과 함께 숙연히 앉아 있었다.
1945년생인 김씨는 1964년 3월 2일 당시 부산대 문리대 사학과에 입학했지만, 9년 후 3학년 1학기 때인 1973년 7월 11일 제적당했다.
그러다 무려 47년 만인 2020년 7월 17일 부산대측으로부터 ‘3학년 1학기 복학’ 승인을 받았다.
그 뒤 지난해 말까지 2년간의 학사일정 이수 및 필수 학점을 따냈고, 이번에 ‘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하게 됐다.
다시 59년 전인 1960년대로 돌아가 보자. 김씨가 제적을 당한 것은 성적 미달 등의 일반적인 이유가 아니라 순전히 스스로의 종교적인 신념과 심취 때문이었다.
그는 대학 1학년이 종료된 1964년 12월 하순 동계방학 때 당시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통일교, 현 가정연합) 부산교회 황환채 담임목사로부터 ‘인생과 우주의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통일원리’를 듣고 충격과 함께 단박에 ‘참된 인간의 가치와 하나님이 인간과 우주를 창조한 목적’을 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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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4일 막내아들 김세훈(34·회사원, 왼쪽)씨 부부와 함께 부산대 재료관 앞 계단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김수용 원로목사 부부. |
만 스무살이 채 되기 전 ‘통일원리와의 만남’은 김씨가 새로운 인생길을 걷게 되는 일대 전기를 맞은 셈이었다.
충격적인 ‘통일원리’ 말씀에 매료된 그는 즉시 가정연합 산하 청년학생기구인 전국대학원리연구회에 가입한 뒤 곧바로 7일, 21일 수련회에 연이어 참석해 종교적 내공을 키워나갔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김씨는 “공자가 ‘아침에 도를 들어 깨달으면 저녁에 죽더라도 괜찮다’는 말을 했는데 저 자신이 꼭 그런 경지였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김씨가 내디딘 종교인의 길은 좁고 험한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배고픔은 기본이고, 피 땀 눈물로 얼룩지고 생사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그런 길이었다.
1965년부터 대학원리연구회 활동에 몰두한 그는 2학년까지 4학기를 이수한 뒤 군복무(월남전 참전)를 이행하고,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학업과 서클을 통한 종교활동을 병행했다.
1972년 10월 8일 경기도 구리시 가정연합 구리연수원. 전국 각지에서 다니던 대학에 자퇴서를 내고 모인 원리연구회 대학생(일명 헌수생) 59명이 전국 시·군 단위 산간벽지의 임지로 목회자 발령을 받고 출발하기에 앞서 ‘출정식’을 한 날이었다.
헌수생들은 이에 앞서 1년 동안 40일 특별수련, 원리강의 연습, 성경 공부, 전도실습 등을 통해 목회준비를 해왔다.
전남 영암군 개척교회 책임자(담임목사)로 발령을 받은 헌수생 김씨는 3년 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선교활동에 매진했다. 그런 사이 1973년 7월 11일자로 부산대 측으로부터 ‘제적’ 통보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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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연합 원로목사인 김수용(78·전 서아프리카 교구장)씨가 코트디부아르 선교사로 파송됐던 1995년 11월 16일 가정연합 창설자인 문선명·한학자 총재 양위분이 세계순회 도중 코트디부아르 수도인 야무크로시를 방문했을 당시 아이보리호텔에서 신도와 시민 등 3000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왕중왕(王中王) 대관식’을 거행하고 있다. 김수용 원로목사 제공 |
김씨는 그 후 부산으로 돌아와 가정연합 일선 교회 및 대학가에서 목회활동을 이어가다 1990년 해외선교단에 자원, 1년 동안의 준비과정을 거쳐 1991년 2월 첫 해외 임지인 아프리카 세네갈 수도 다카르에 첫 발을 내디뎠다.
세네갈 내 가정연합 교회의 선교 여건은 너무나 열악했다. 세네갈 전체 교인이래야 30여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전임 선교사 때 교회 신축 때 빌린 돈을 제때 갚지 못해 교회와 교회의 '생계용 햄버거 가게'마저 압류당해 교회는 사라지고 선교사 김씨는 알거지 신세가 됐다.
예배당이 사라지는 바람에 일요일에는 공원에 모여 예배를 드렸다.
김씨는 끼니 해결을 위해 몇몇 교인들과 항구에 나가 썰물 때 스스로의 힘으로 바다로 나가지 못하는 고깃배를 밀어주고 받아온 물고기를 구워먹으며 근근이 생활했다.
당시 생활에 대해 김씨는 “한 번은 너무나 먹을 게 없어 사흘을 굶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본 교인도 아닌 한 세네갈 여성이 먹을 것을 갖다주기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 적이 있었다”며 “영암교회에 시무할 때, 한겨울에 오갈 곳이 없던 중년의 한 걸인 여성을 3개월 동안 교회 안에서 묶게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여성의 조상이 아프리카를 구원하러 왔다가 굶고 있는 처량한 선교사의 모습을 보고 신세를 갚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라고 회상하며, 금새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세네갈에서 만 3년을 채운 김씨는 1994년 초 실적 부진으로 본국 소환을 염려하던 차에 가정연합 세계선교본부로부터 교세가 세네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코트디부아르(수도 야무스크로) 선교책임자 및 ‘서아프리카 교구장’ 발령을 받고 이동해 400여명의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첫 예배를 드렸다.
김씨는 이곳에서 '하나님! 코트디부아르를 축복하소서'라는 희망을 담은 제목으로 지방교회 순회 대부흥회 활동을 통해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런 애국적인 선교활동에 크게 감명을 받은 야무스크로시의 최대 세력을 가진 대 추장의 주관 아래 시민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대관식에서 김씨는 ‘야무스크로시 명예 왕(王)’으로 추대됐다.
이 행사가 계기가 돼 이듬해인 1995년 11월 16일 가정연합 창설자인 문선명(2012년 성화) 총재와 한학자(80) 총재 양위분이 세계순회 도중 첫 번째로 코트디부아르를 방문했다.
문·한 총재는 인구가 200여만명인 코트디부아르 최대 도시인 아비짱의 아이보리호텔에서 가정연합 신도와 일반시민 등 3000여명에 달하는 청중이 모인 가운데 ‘왕중왕(王中王) 대관식’을 전세계에서 최초로 거행했다.
당시 3분여에 걸친 환영의 박수가 멈추자 문 총재는 연단에 올라 “코트디부아르는 참으로 훌륭한 나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을 깃점으로 더욱더 발전해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라가 되어 영원토록 하나님의 축복받는 나라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할레루야! 감사합니다”라는 승리와 축복의 메시지를 남기자, 식장은 천지가 진동하는듯한 축제의 장으로 변했다.
코트디부아르는 1999년 가정연합 우수선교국으로 선정됐다.
10년에 걸친 아프리카 선교 임무를 수행한 김씨는 2000년에 귀국, 목회활동을 계속하다 만 65세 정년을 맞아 2010년 일선에서 물러나 현재는 원로목사로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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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연합 원로목사인 김수용(78·전 서아프리카 교구장, 사진 오른쪽에서 세 번째)씨가 코트디부아르 선교사로 파송됐던 1994년 10월 코트디부아르 수도 야무스크로시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진 대 추장의 주관 아래 시민 1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야무스크로시 명예 왕(王)’에 추대되는 대관식을 하던 당시의 모습. 김수용 원로목사 제공 |
그는 귀국 직후 못다 이룬 대학 졸업의 꿈을 이루기 위해 여러 차례 부산대를 방문했으나 그때마다 “관련 법과 학사규정 상 복학이 불가능하다”는 설명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러는 새 나이가 70대 중반을 넘어섰지만 언제나 마음 한켠에 ‘대학 졸업’이라는 향학의 꿈을 간직하고 있던 그에게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김씨의 애끓는 사연을 듣고 전화번호를 메모해둔 부산대 학적부 관계자로부터 “관련 법이 개정돼 김수용 선생의 경우와 같은 초장기 제적생도 복학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김씨는 관련 서류를 준비해 2020년 7월 복학 절차를 마무리하고 온라인 수업을 통해 학업을 재개했다.
다행히 그는 월남전 참전 유공자인 관계로 수업료 등 학비 전액이 면제되는 혜택을 받았으나, 컴퓨터라는 새로운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필 코로나19 여파 때문에 수업이 비대면 온라인으로 진행된데다 컴퓨터 자판 타자에 능숙하지 못해 독수리타법을 구사해야 하는 70대 후반의 노 목사에겐 학사학위 논문 등 모든 과제물을 ‘한글 문서’로 작성해 전자메일로 송고해야 하는 2년이 보통 사람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목숨을 건 사투에 가까운 인고의 세월이었다.
김씨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내 나이 80을 목전에 둔 입장인데, 40여년 동안 국내외 선교활동을 하면서 쌓은 경험과 경륜을 토대로 한 일종의 ‘인생 종합참고서’ 같은 성격의 책을 써볼 소망을 품고 있다”며 “통일원리를 듣고 인생의 도를 깨달은 만큼, 여생도 민족과 하늘 앞에 ‘충효의 도리를 다하는 삶’으로 마무리하고 싶다”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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