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탕 오찬과 라이사 여사의 마음을 돌린 환대
국가의 자존심과 민간의 실리
고르바초프의 한반도 평화 통일 지지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북핵 위기로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던 1994년 3월, 냉전 종식의 주역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이 서울 한남동 문선명 총재 사저를 찾았다. 공산주의 종주국의 마지막 수장과 평생을 '승공(勝共)'에 바친 종교 지도자 문선명 총재의 재회는 그 자체로 세계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냉전의 종언을 고했던 ‘철의 사나이’ 고르바초프의 방한은 거대한 정치적 폭풍이었다. 대중의 시선이 청와대로 쏠려 있던 순간, 정작 외교 관계자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한 진짜 드라마는 청와대와 한남동 사저 사이, 약 10km의 거리 위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이는 단순한 전직 국가 수반의 방문을 넘어, 철의 장벽을 허문 두 주역이 냉전의 마지막 화약고인 한반도에서 평화의 메시지를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당신은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90년 4월, 모스크바 크렘린 궁에서의 첫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슬 퍼런 크렘린 궁에서 이루어진 단독 면담에서 문 총재는 고르바초프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개혁을 멈추지 말 것"을 권고하며, "대통령님, 당신의 개혁은 하나님의 손이 함께하는 일"이라는 파격적인 발언을 던졌다.
자칫 외교적 결례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고르바초프는 이 이례적인 종교 지도자의 담대함과 화법에 오히려 신뢰를 느꼈다. 훗날 그는 "문 총재의 확신에 찬 모습에서 진정성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이 만남은 그해 9월 한소 수교라는 기적 같은 결실의 밑거름이자 '민간 외교의 마중물'이 되었다.
곰탕 오찬과 라이사 여사의 마음을 돌린 환대
4년 뒤 서울에서 재회한 두 사람은 정치가 아닌 '형제'로서 대화를 나눴다. 이날 한남동 자택에서 준비된 한국식 오찬은 긴장감 대신 훈훈한 정이 넘쳤다.
문 총재가 "우리는 이제 이념을 넘어선 형제"라며 직접 한국 음식을 권하자 고르바초프는 "모스크바보다 서울에서 만나니 훨씬 가깝게 느껴진다"며 '진정한 친구'임을 강조했다.
처음엔 종교 지도자 사저 방문에 신중했던 라이사 여사도 한학자 총재의 세심한 환대와 꽃다발에 마음을 열었다. 두 여사는 교육과 여성의 역할을 주제로 깊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오찬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한반도 통일 지지
고르바초프는 독일 통일의 경험을 언급하며,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이 세계 평화의 마지막 퍼즐임을 강조했다.
붓글씨 선물 '천운(天運)'에 담긴 메시지
오찬 후 문 총재는 고르바초프에게 직접 쓴 휘호 '천운(天運)'을 선물했다. 지도자 한 명의 결단이 인류의 운명을 바꿀 수 있음을 강조하며 전달한 격려의 메시지였다. 고르바초프는 퇴임 후에도 이 만남을 소중히 기억하며, 2012년 문 총재가 별세했을 때 "세계 평화를 위해 헌신한 나의 친구"라며 직접 조전을 보내 의리를 지켰다.
국가의 자존심과 민간의 실리: 김영삼 정부의 고심
출범 2년 차의 김영삼 정부에게 고르바초프는 노태우의 유산인 동시에 반드시 품어야 할 문민의 자산이었다. 청와대는 그를 국가 원수급으로 예우하며 한국의 발전상을 각인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행보가 공식 외교의 틀을 넘어 한남동 사저로 향하자 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외무부 내부에서는 민간 종교 단체의 외교적 영향력이 부각되는 것에 대해 부담스럽다는 기류가 역력했다. 특히 북핵 위기 속에서 문 총재가 북한 김일성 주석과 이미 물꼬를 튼 상태였기에, 이러한 거물급 인사의 사저 방문은 정부 입장에서 민간 외교의 월권으로 비쳐질 소지가 있었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는 이를 실용적으로 묵인했다. 고르바초프의 행보가 결과적으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북한에 남한의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과시하는 유효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청와대의 엄숙함과 한남동의 온기가 교차했던 1994년의 봄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진정한 평화는 국경과 이념을 넘어선 민간의 ‘진심 어린 신뢰’에서 완성된다는 점이다. 30여 년 전 한남동에서 피어오른 곰탕 김 너머의 웃음소리는 오늘날의 경직된 남북 관계에도 여전히 유효한 울림을 주고 있다.
로컬세계 / 이승민 대기자 happydoors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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