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컬세계] 한·일 국교 정상화 50 주년을 앞에 두고 최악이라던 한·일 관계에 가까스로 출구가 보인다.
▲ 추성춘 생활정치 이사장 © 로컬세계
아베 일본총리가 TV로 중계된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의원의 질의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고노 담화- 위안부 모집에 구 일본군의 관여와 강제성을 인정) “재검토 할 생각은 없다”라고 말하고 일본정부 관계자가 한국 대사관에 “TV 중계를 봐 달라”(교도통신 보도)라고 했으며 아베 총리 측근은 (한국을 방문했던 사이키 외무차관의 보고를 받은 총리가) “(한국에 대해) 최대한의 배려를 나타 낼 수밖에 없다고 (총리가)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고 전하고 있다.
아무튼 아베총리가 고노 담화 작성과정의 재검토를 명확히 부정했고 박근혜 대통령도 주일 한국 대사관으로부터의 보고와 관련, “다행으로 생각 한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한·일 관계는 ‘무라야마 담화’(침략 사죄)와 ‘고노담화’를 바탕으로 이뤄진 사실을 강조하고 이것이 지켜진다면 자신은 한·일 정상회담을 안 한다고 말한 적이 없음을 밝힌 적이 있다.
그동안 문제는 모두가 잘 알다시피 아베 총리가 박 대통령의 발을 밟고 있으면서 말로는 정상회담을 하자고 했기 때문에 저질러진 일들이다.
아베정부도 민주 정부로서 전임 총리와 정부의 공식 문서나 발언 내용을 쉽게 뒤엎는 일이 거의 불가능 하다는 건 안다. 다만 일본 국민이 아닌 ‘아베 지지자들’만은 배려하고 싶었을 것이다.
사실, 일본 정부가 ‘위안부에 대한 구 일본군의 관여와 강제성’을 부인하고 국가 차원의 사죄를 거부하는 건 “식민지 지배 자체는 불법이 아니다‘라는 억지 주장과도 맞닿아 있다.
결국 1965년 한·일 기본조약에 식민지 지배 책임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것이 문제다.(일본 전문가)
‘독도’는 한국 침탈의 최초의 희생물로, 영유권 분쟁의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주장하는 것은 ‘식민지 지배 자체가 불법이 아니라는 것’으로 연결된다.
60년 전 당시 변영태 외무장관의 지적대로 “독도는 한국 독립의 상징이요 독도 탈취는 한국을 다시 침략하는 것이다”
이제, 급변하는 동북아 안보환경 변화의 불확실성으로, 광풍처럼 소용돌이치던 ‘아베회오리’는 이쯤해서 표면상으로는 가셔질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다 ‘아베’의 선택은 ‘일본 국민의 선택’이 아닐 수 있다는 정황이 차츰 드러나고 있다. 일본 국민은 여전히 ‘아베’에게 ‘NO’라고는 말하지 않고 있지만 역사인식의 문제로 일본이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흔히 일본에는 비판적 시민세력이 없다거나 ‘데모가 없는 나라’라고도 말해지지만 21세기 일본은 엄청난 지적, 사상적 잠재력을 갖춘 나라다. 그런 일본국민이 고개를 절반쯤 돌리기 시작 했다는 점이다.
아베 총리 지지율이 소속 정당인 자민당의 지지율을 앞서지 못하거나 당의 지지율을 밑돌게 되면 때가 온 것이다. 자민당의 다른 사람이 총리를 해도 된다는 국민들의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러하니 일본은 앞으로 많은 변화를 겪게 되겠지만 그렇다고 쉽게 과거로만 되돌아가지 못할 것이고 더욱이 국제질서가 일본만의 ‘마이 웨이’를 받아들일 수도 없다.
오늘날 국제질서를 내용적으로 규율하는 건 정치와 군사 보다 무역과 투자로 뒤엉킨 경제다.
이 시간 현재도 정치적 갈등 속에서도 경제의 궤도는 유지 된다.
만약 아베 내각이 ‘아베이코노믹스’에 환호하는 국민감정을 이용해(과거 나치 독일의 히틀러가 경제적 호황감과 상승기류에 대한 국민들의 환각 상태를 이용해 제국주의로 달려 같듯이)) 미국과 국제상식이 납득할 수 없는 수준으로 까지 역사수정주의로 질주한다면 최악의 상황에 빠지기 전에 일본 국민이 우선 ‘아베 NO’라는 깃발을 들것이다.
‘아베 내각’이 갈 길은 일본 국민에게 맡겨두면 된다.
아베 총리의 ‘당황한 불끄기’의 배경에는 4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한·일 양국방문 전에 한·일 관계를 개선하라는 미국 측의 ‘압력’이 작용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일본이 단순히 압력에 무릎을 꿇었다고 보는 건 그야말로 표피적이다.
외교란 ‘하나의 과정’이고 단계를 밟아가면서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더욱이 미국의 요구가 강력했던 것은 한국을 편들기 위해서도 아니고, 다만 미국의 국익 관점일 뿐이다. 부수적인 의미들을 과장해 ‘애국보도’를 하는 건 한국의 수준에 맞지 않다.
아베 총리는 개인의 정치적 소신이나 지지자들에 대한 ‘정치적 약속’을, 국익과 국제질서 안정 보다 앞세운 바람에, 미국과 함께 국제평화질서를 구축해 갈 자질과 능력을 겸비한 믿을만한 지도자 인가 라는 의심을, 미국 안에 불러일으킴으로서 이른바 ‘아베리스크’-신뢰 상실-(일본 오카자키 연구소)를 만들고 말았다. 이것이 미국의 국익 관점이다. 미일 동맹의 강화는 일본국가의 생존 전략임에도 불구하고 아베 내각은 ‘너무 나가고 말았다.’
만약 미일 갈등이 노골적으로 표면화 되면 동북아의 안정은 큰 상처를 입는다.
한바탕 쓰나미가 지나고 난 뒤 황폐한 삶터를 재건하기란 고통스러움의 연속이 될 것이다.
그러나 ‘꽃은 다시 피고, 또 다시 피어야 한다’ 한·일 양국은 역지사지와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외교력을 복원하고 협력과 상생의 관계를 다시 일궈가야 한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 양국 민관 위원회 등을 설치해 이성적인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아배 총리가 재임 중 다시 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확인하면 될 것이다. 주요 전쟁 범죄자가 합사 된 이후부터는 천황도 참배하지 않고 있다.
국가라는 분모가 부딪치면 분자의 국민이 고통 받을 수밖에 없다. ‘소리 없는 일본국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진정한 일본의 리더 이며 인류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더욱이 국가의 대표가 개인의 정치적 신조만을 앞세워 자국민과 이웃 나라에 마음을 아프게 해서는 국제적인 지도자가 될 수 없다.
서방 여러 나라를 가면 동양인의 외모를 접하고는 다 “일본 사람입니까?”라고 첫마디로 묻던 시절이 있었다. 그만큼 일본인을 ‘대단하게’ 봤다는 사실이다. 지금도 여전 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일본이 돈으로 친구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필자가 80년대 일본 특파원 시절, 당시 지도층 지인들을 만나면 “식민지 지배 시절, 일본의 행보를 아는 우리가 죽고 나면 한·일 관계가 더 어려워질지 모른다. 우리가 살아 있을 때 잘 풀어 놓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 말을 자주 들었다. 선배 지도자들의 이 말을 아베 총리도 다시 기억하기를 바란다. 아베 총리의 선친인 아베 신타로 당시 외상은 한·일 관계를 대단히 중요시 했던 정치인이다.
아베 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전 수상은 전범으로 지목 돼 격리 수용 중에도 “2차 대전은 성전이니 대대로 전하라”고 극언을 했지만 한국의 경제적 발전과 박정희 대통령의 탁월한 리더십에 관해서는 각 국 지도자들에게 이를 소개한 일화가 드물지 않다.
아베총리는 선배들의 잘못은 버리고 좋은 점만 되살려 한·일 관계의 새 비전을 세워주기 바란다.
한국 정부는 이제 정상회담을 준비할 시간이 아닌가. 요즘은 국가 간에 정상·수뇌 회담을 한다고 해서 자국 국민에게 선물 보따리를 꼭 안겨 줘야 하는 시대가 아니다.
“손에 쥘 것도 없는 데 무슨 정상 회담이냐‘고 푸념하지 말기 바란다.
이런 말하기가 좀 쑥스럽기는 한데, 정상 외교에는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 보다 한 수 위라고 본다. 박 대통령도 아베 총리에게 직접 해주고 싶은 애기가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정면 돌파, 직구 승부다. 설령 무승부 여도 만나서 대화하는 것이 낫다.
또 박 대통령이 먼저 일본을 방문한다고 해도 동포들의 안방이 훈훈해 질 생각을 하면 괜찮은 일이 아닌가.
[저작권자ⓒ 로컬(LOCAL)세계.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