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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15일 서울 여의도 국민은행 본점 앞에서 전국 228개 지방의회 의원 1500여명이 정당공천제 폐지를 촉구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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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단위 지방선거의 정당공천제 폐지가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방정치가 중앙에 예속되고 단체장과 지방의원 자질론이 불거지는 등 문제가 심각해 풀뿌리 지방자치 정착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한국지방자치학회가 지난 28일 발표한 기초자치단체장 정당공천제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공직자, 교수, 공무원 등 행정 전문가 집단 212명 중 184명(86.8%)이 지방자치제도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과제로 정당공천제를 지적했다.
같은 내용으로 일반인 1000명에게 실시한 설문 결과 정당공천제 폐지 찬성의견이 46.7%로 반대 의견(36.2%) 보다 높았다.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도 최근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정당공천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국 228개 시·군·구의회 의원 1500여명은 지난해 11월15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결의대회를 갖고 정당공천제 폐지를 주장했다. 기초지자체 단체장들도 지난해 10월20일 열린 전국 시장·군수·구청장 총회에서 풀뿌리 지방자치 정착을 위해 정당공천제 폐지를 촉구했다.
정당공천제 폐지의견이 봇물처럼 쏟아지는 이유는 공천제로 인한 폐해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지역주민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 지방정치가 중앙정치에 예속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의 공천권은 해당 지역 국회의원이나 지구당 위원장에게 있다. 단체장과 지방의원이 중앙 정당과 이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단체장과 의원 자질 문제도 심각한 상황이다. 매년 실시되는 지방의회 행정감사에서 지역의원들의 자질문제가 거론되며 일부 단체장은 인사비리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기본적 소양보다는 공천권자에게 ‘충성’하는 이들이 공천권을 얻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풀뿌리 지방자치 실현, 공천비리 및 중앙정치 예속 방지 등을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정당공천제가 폐지돼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탑 다운 방식 ‘민의 왜곡’…제왕적 지구당 위원장 양산
왜 정당공천제는 나쁜 관행일까
기초 단체장·광역-기초의원 ‘공천권 행사’ 공천헌금·자질부족
지방자치 20년 불구 아직도 전근대적 선출 방식 고집 ‘부작용 속출’지난해 10월20일 충남 예산군 덕산 리솜리조트에서 열린 전국 시장·군수·구청장 총회 참석자들이 회의가 끝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풀뿌리 지방자치가 시작된 지 20년이 넘었다. 사람으로 치면 성년에 해당한다. 그러나 풀뿌리 지방자치는 걸음마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는 것이 정당공천제다. 지방정치의 중앙 예속, 기초의원과 단체장의 자질논란, 공천헌금 비리 등은 모두 지방선거 정당공천제의 폐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다. 최근 생활정치 구현을 위해 기초단위 지방선거의 공천제 폐지 움직임이 나오는 이유다.
기초단위 지방선거 공천권을 가진 국회의원과 지구당 위원장은 기초의원을 ‘몸종’ 수준으로 부리고 있다. 기초의원은 정치적 ‘생명줄’을 쥐고 있는 이들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다. 자칫 눈밖에 나면 다음 선거 때 공천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주민들을 위해 발로 뛰기보다는 공천권자의 ‘거수기’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 셈이다.
지역 내 행사를 열심히 뛰는 기초의원들 중 일부는 서울에 있는 국회의원을 대신해 참석하는 경우가 많다. 지역구 관리를 도맡아 하는 셈이다. 국회의원 재선을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심지어 국회의원 대신 참석한 배우자의 핸드백을 들고 다니는 등 비서 역할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역주민의 일꾼으로 선출된 기초의원들이 한순간에 국회의원 개인의 일꾼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실제로 2006년 부산의 구청장 후보 공천 과정에서 ‘충성서약서’ 사건이 불거졌다. 한 구청장 후보가 지역구 국회의원의 총선을 책임진다는 내용을 약속한 사건이다. 국회의원이 기초의원 등 지역 정치인을 장악하는 수단으로 정당공천제가 악용된 사례다.
2005년 개정된 현행 공직선거법은 중앙정당이 지방의회 후보자를 공천하도록 하는 ‘정당공천제도’를 규정하고 있다. 법에 따라 정당이 기초의회 후보자를 선정하는데 적극 개입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줬다는 게 정치계 안팎의 평가다. 기초의원의 의정활동에 있어 중앙정치 예속화를 피할 수 없게 된 이유다.
지역현안보다 중앙정치 우선
지자체를 견제하고 주민들의 권익을 보호해야할 기초의원들이 대선과 총선, 지방선거 때마다 당 후보의 당선과 소속 정당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온힘을 쏟고 있다. 국회의원 역시 이를 개선하기보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악용하는 사례가 적잖다.
정당의 눈치를 보는 기초의원들은 소신보다는 당의 정책에 따라 행동한다. 지역 현안보다는 당이 내세운 이슈와 정책에 목소리를 높인다. 지역 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생활정치 실현은 멀기만 하다.
지방선거에서 이 같은 폐단은 더욱 확실하게 드러난다. 지역주민을 위한 지방선거가 아니라 중앙을 위한 지방선거로 전락한 것이다. 지역 일꾼을 뽑는 지방선거가 중앙정당의 대리전으로 변질돼 지방자치가 퇴색되고 있다.
지난해 10.26재보선과 4.27재보선 후보자들은 지역적 현안보다는 복지표퓰리즘 반대와 정권심판론 등 각 정당의 구호 외치기에 앞장섰다.
경기 부천시의회 A의원은 “지구당 위원장의 지시를 어기는 것은 쉽지 않다”며 “풀뿌리 생활정치를 실현하려면 지역 현안에 귀 기울여야 하지만 정당정치에 목맬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어려움을 말했다.기초 지방선거공천폐지 전북 후보자연합이 2010년 5월18일 전북도의회 브리핑룸에서 정당공천제 폐지를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자질 부족해도 줄서기 공천으로 당선
줄서기 공천의 폐해는 기초자치단체장과 의원들의 자질 문제로 이어진다. 개인적 능력보다는 공천권자에게 헌신하고 ‘줄을 잘 대는’ 인물들이 공천받기 때문이다. 실력과 인품이 부족한 이들이 기초의원·단체장 후보로 나와 당선되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주민에게 돌아간다.
광주 북구의회 의원 2명은 회기 중인 지난해 7월 한 의원 사무실에서 지인들과 고스톱을 치다 경찰에 적발됐다. 화순군 B의원은 “전화 받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며 책으로 공무원 머리를 내리쳐 지난해 5월 대법원에서 징역형을 받았다.
단체장도 기초의원과 별반 다르지 않다. 민선 4기에서만 230명의 기초단체장 가운데 100여명이 비리와 부정으로 기소되고 35곳에서 재선거를 치렀다. 자질 없는 단체장들로 인한 재보선 비용으로만 수백억원의 혈세가 낭비됐다.
기초의원과 단체장의 자질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매년 지방의회 행정사무감사에서 기초의원들의 미흡한 감사로 행감 무용론까지 나오고 있다. 의회 본연의 집행부 감시 기능을 펼치는 중요한 기회를 스스로 무산시키는 것이다. 일부 의원들은 자료 수집과 검토를 소홀히 해 질문 없이 시간만 보내기도 한다.
줄서기 공천은 불법 공천헌금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를 안고 있다. 단체장들이 재정을 고려하지 않은 치적쌓기식 토건사업을 남발하고 각종 비위를 저지르는 건 공천헌금을 마련하기 위함이란 의견이 나온다.
2010년 6.2 지방선거 당시 지역 정가에서는 자질이 부족한 일부 기초의원과 단체장 후보들이 지구당에 불법 공천헌금을 제공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한 전문가는 “지방선거와 총선의 선거주기가 달라 현역의원은 여야 할 것 없이 다음 선거를 위해 자기사람을 기초의원·단체장으로 심고 싶어 한다”며 “지역 정가에서 경선 후유증과 공천 잡음이 끊이지 않는 만큼 기초지방선거 정당공천제는 폐지돼야 한다”고 말했다.
선진국 정당공천 배제
선진국들은 정당공천을 배제하거나 상향식 공천을 하고 있다. 지방정치가 중앙에 종속되는 부작용을 차단하고 지역 주민의 관심사를 더 많이 반영하기 위해서다. 생활정치가 꽃피는 이유다.
일본은 지사부터 시·정·촌장 등 99%에 이르는 숫자가 무소속 출신이다. 국정은 정당이, 지방자치는 무소속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셈이다.
미국은 지방자치단체 70% 이상이 ‘정당표방금지제’를 실시하고 있다. 미국 지자체들이 정당 관여를 배제하는 것은 건국 이래 엽관제도(선거에 공이 있는 사람에게 공직을 나눠 주는 제도)의 폐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정당표방금지제도 이전에는 선거 때마다 고위공무원이 모조리 바뀌어 지역 행정이 엉망이 됐다.
유럽은 풀뿌리 생활정치가 정착돼 우리나라처럼 국회의원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상향식 공천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영국은 지역주민들이 중앙당에서 제시한 후보자 명단을 살펴보고 후보를 선출하는 혼합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프랑스와 독일은 당원들이 함께 모이는 총회에서 직접 추천과 투표로 기초의원 후보자를 선출한다.2010년 7월20일 서울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지방선거 제도 개선 ‘지방선거제도 이대로 좋은가?’ 토론회가 열린 가운데 이종수 연세대 교수가 주제발표를 하고 있다. 민의+후보 검증 상향식 공천이 답이다
정당공천제 대안은?
정당표방제 = 후보자가 지지하는 정당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제도다. “나는 ○○당의 정책을 지지한다”고 밝히는 것이다. 정당공천제와 달리 입후보자가 지지하는 정당을 밝혀 유권자에게 선택의 편의를 제공한다. 정당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는 유능한 지방정치인을 흡수해 정당의 체질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또한 당을 지지하는 후보자를 위해 당의 지방정책을 개발 지원하게 된다. 이를 통해 중앙정치과정에서 지방의 이익을 반영하는 계기가 만들어진다. 지역정치에 정당이 관심을 두고 참여해 지역 현안이 이해집단이나 유력자에 휘둘리는 경향이 줄어든다.
지역정당제 = 지역정당은 지방선거에만 참여하는 정당이다. 특정 지역에만 뿌리를 내리고 있어 중앙정치보다는 지역현안을 해결하는 데 효과가 크다. 지역문제를 자율적으로 해결할 수 있고 불필요한 중앙정치의 개입을 차단할 수 있다. 우리나라와 같이 지방정치가 중앙정치에 예속된 경우 도입 필요성이 제기된다. 중앙정치보다 지역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해결하는 일에 중점을 둔 지역정당들이 지방자치의 기본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독일과 일본의 경우 지역정당제를 시행하고 있다. 독일은 가장 낮은 지방자치 단위인 ‘게마인데’에서 유권자 단체들이 상당한 의석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주요 정당의 지지기반이 지역성을 띠는 한국의 현실에서 지역정당이 나타날 경우 정당구조의 중첩성으로 지금보다 더 큰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주민추천제 = 명칭 그대로 주민들이 후보자를 추천하는 제도다. 현재 무소속 후보 등록과 비슷하게 일정 수 이상의 주민 서명을 받으면 후보 등록이 가능하다.
지방자치 위협하는 주범 86.8% 당장 폐지해야
행정전문가들이 보는 정당공천제
선출직 공직자를 포함한 교수와 연구원, 공무원 등 행정전문가 10명 가운데 8명 이상은 현행 기초자치단체장 선거에서의 정당공천제 폐지를 주장했다.
이러한 사실은 최근 한국지방자치학회가 전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의뢰를 받아 기초차지단체장의 정당공천제에 대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나타났다.
선출직 공직자, 교수, 공무원 등 행정전문가 212명은 지방자치제도상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86.8%(184명)가 기초자치단체장의 정당공천제를 지적했다. 다음으로 3선 연임제한(4.7%), 과도한 선거운동 규제(4.3%), 입후보자 사퇴시한(3.3%) 순이었다.
정당공천제 폐지 이유로는 공천이 당선으로 이어지는 정치풍토 개선이 49.5%로 가장 많았다. 공천과정에서 나타나는 비리와 부정부패 근절(27.7%), 소신 있는 지방행정 수행 확대(22.3%)도 지적됐다.
정당공천제에 대한 일반 주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폐지찬성이 46.7%로 반대 (36.2%) 보다 높게 나타났다.
전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는 정당조직의 민주화, 정당의 지역주의 탈피 등 정당정치가 발전한다는 전제하에 한시적으로 정당공천제를 폐지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분석했다.
협의회 관계자는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공청회를 열고 중앙 정치권에 조사결과를 전달하는 등 정당공천 폐지를 위해 역량을 결집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라안일 기자 raanil@segye.com
- 기사입력 2012.01.06 (금) 14:45, 최종수정 2012.01.06 (금)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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