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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 |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기원전 57년, 고구려가 기원전 37년에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그 기록은 이미 1920년대부터 단재 신채호를 필두로 많은 민족 사학자는 물론 친일 사학자라고 구분되는 이들까지 남북 공통으로, 신라 우선주의를 내세우기 위해서 김부식을 비롯한 편찬자들에 의해 고구려 역사를 삭감하기 위해서 건국연대가 늦춰진 것이라는 주장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그러나 고구려 건국연대에 대해 확실한 연대를 정의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이론을 기반으로 약 200여년 소급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주를 이루었다.
고구려 건국연대에 대한 문제점을 내세우는 학자들의 보편적인 견해는 대략 4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추모왕의 17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12세손으로 기록되어 5세손이 삭감된 점.
둘째, '삼국사기'의 사론에 사대사상에 젖은 김부식이 고구려가 진(秦, 기원전 221년~기원전 206년).한(漢, 기원전 202년~220년)의 동북쪽 귀퉁이에 있었다고 기록한 점.
셋째, ‘유국900년’설로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당시, 시어사 가언충이 당 고종에게 ‘'고려비기'에 고구려가 건국된지 900년이 못되어 멸망한다고 되어 있는데 고구려가 건국된지 900년이 되었다’고 보고 했다는 것.
넷째, 한사군 설치 당시 현도군에 ‘고구려현’을 설치하였는데 그 안에 누가 살았는지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었으니 그리했다는 것.
이상의 네 가지 주장이 나름대로 모두 합리적인 주장임을 입증할 수 있다.
첫째, 5세손이 삭감되고 멸망한 연대가 명시되었으니 중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당연히 건국연대가 늦춰질 수밖에 없다.
둘째, 진나라의 동북쪽에 있었다고 했으니 당연히 기원전 221년~기원전 206년 사이에서 그 건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합리적인 추론이다. 물론 진나라는 기원전 900년경부터 존재했던 나라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통일 제국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셋째, ‘유국900년’설은 비록 비기라고는 하지만, 적군의 장수가 침략전에 많은 연구를 했을 것이므로,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은 건국된지 900년에 가까웠다는 것을 알 수 있기에 중요한 것이다.
넷째, 기원전 108년의 ‘고구려현’ 설치 문제는 고구려라는 나라가 있었으니 설치했지, 고구려라는 나라가 건국될 것을 알고 미리 설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한 손영종은 이상의 이론들과 '삼국사기', '삼국유사'는 물론 고구려 건국연대를 다룬 사서들이 한결같이 고구려 건국연대를 갑신년이라 지칭하는 점을 근거로, 1990년 1월에 발행된 '력사과학' 루계 133호에 게재된 「고구려 건국년대에 대한 재검토」라는 논문에서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277년으로 정의했다. 그리고 현재 북한에서의 모든 연구서는 물론 학생들의 교과서 역시 고구려 건국연대를 기원전 277년으로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손영종의 이론에는 커다란 오류가 있다.
손영종 스스로 통일 진나라 이전에 고조선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던 연나라가 멸망한 것이 기원전 222년이라는 사실을 같은 논문에 기술해 놓고도, 고구려가 통일 진나라와 국경을 마주했을 것이니 건국연대를 기원전 277년으로 해야 한다고 서술했다. 기원전 222년까지 연나라가 고조선과 국경을 마주했으니 진나라는 221년 대륙 통일까지는 고조선이나 고구려와 국경을 마주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손영종의 주장대로 고구려가 기원전 277년에 건국되었다면 고구려는 진.한의 동북쪽이 아니라 연.진.한의 동북쪽이라고 기록했어야 한다.
또한 손영종은 삭감된 5세손의 왕 5명을 찾는다고 하면서, 4명을 찾아낸 후에는 나머지 1명은 찾을 수 없다고 한 후, 무조건 5세손에 얽매여 고구려사에 기록된 유리왕부터 동천왕까지의 5세손 10명의 왕 재위 연수를 모두 합산하여 삭감된 5세손의 재위 연수로 치부하고 고구려 역사에 합산함으로써 오히려 고구려 역사를 더 길게 늘어나도록 하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신용우 행정학박사(지적학전공)/작가/칼럼니스트/영토론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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