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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관문 조령관 : 문경새재의 정상으로 시원하고 신선한 바람이 감사하다. |
요즘은 여행이 어렵다. 해외여행은 당연하고 국내도 물론이다. 하지만, 여행은 인간을 풍요롭게 한다. 삶에 지친 몸과 맘에 쉼과 힘을 준다. 특이하게 인간은 바깥 공기를 마시면 활력이 생긴다. 신선한 공기는 바로 나무에서 나온다. 그런데 나무는 산에 많다.
신선한 공기와 나무를 찾아 문경새재를 찾았다. 더구나 문경새재(이하, 새재)는 역사적 흔적이 많아 스토리가 있는 관광지다. 새재는 조령(鳥嶺)이라고 한다.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산길로 잇는 약 이십오리(10km) 고갯길이다. 이 고개 높이 642m로 백두대간이 지나가는 곳이다. 또한,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길이다. 옛날 이동할 때는 주로 뱃길을 이용했다. 그러므로 새재는 서울과 영남 사이에서 실제로 걷는 길이가 가장 짧았을 것이다.
새재로 접근은 충주(서울) 북쪽에서 가는 길, 문경 남쪽에서 가는 길이 있다. 전자는 고개 정상인 제3관문(조령관)까지 고사리 주차장에서 약 1km 1시간 이내 거리로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후자 남쪽 방면 제1관문(주흘관) 주차장에서 9㎞ 3시간 내지 4시간 정도의 오르막길이다. 이쪽이 더 힘들 수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급경사는 없고 쉼터가 많다.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는 흙길로 잘 다듬어져 있다. 조금 힘든 산행을 원하는 사람은 백두대간을 잇는 조령산(1017m), 주흘산(1106 m), 신선봉(967m), 마패봉(925m) 등을 곁들여서 오르면 된다.
새재 옛길 전체가 나무로 우거진 숲길이므로 한여름에도 걷기에 좋다. 더구나 고개 정상인 조령관 문아래 서면 차가운 바람이 불어 추울 정도로 시원하다. 여름 피서에 딱 맞춤이다. 더욱이 요즘 같은 사회적 거리를 두기에도 수월하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좋은 사람과 이야기하며 걷기가 편하다. 천천히 옛길을 음미하며 걸으면 건강한 몸과 마음이 절로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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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경새재 과거길 10km는 나무가 울창하게 그늘 막을 만들어준다. |
이 길에는 옛 선조들의 흔적이 많다. 우거지 나무, 깊은 계곡이 이어진다. 계곡의 물은 맑고 깨끗하다. 길가에는 정돈된 도랑에서 물이 흐르므로 쉽게 손이나 얼굴을 씻을 수 있다. 중간에는 물레방아도 있다.
흔히 새재는 과거길이라고 한다. 영남의 선비들이 이 길을 통해 상경해서 과거를 봤다. 수많은 인재가 새재를 통해 등용되었다. 안내문을 보니 호남에서도 일부러 먼 길을 돌아 새재를 통해 과거 보러 갔다고 한다.
제1관문 근처에는 교귀정, 용추정, 조산, 기도굴, 산불됴심 표석이 있다. 신구 경상감사가 임무를 교대할 때 업무를 인계인수하던 교귀정이다. 전설에는 과거에 낙방한 선비가 집에 가지 못하고 자진한 곳이 용추정 계곡이란다.
조산은 돌을 쌓아 만든 산 모양의 소원 성취 돌탑이다. 기도굴은 초창기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피해 기도한 자연동굴이다. 산불됴심 표석은 국내 유일의 한글 비석이다. 도중에는 몇몇 고을 수령들의 선정비도 남아 있다.
제2관문 조곡관은 임진왜란 도중 1594년 충주 신충원이 새재에서 처음으로 쌓은 성이다.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은 충주에서 방어진을 쳤다. 신립은 3일 만에 탄금대에서 전멸했다. 새재의 협곡에서 진을 쳤다면 효과적인 방어했을 거라고 역사에서는 아쉬워한다. 그렇지만, 새재를 실제로 와 보니 그렇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에 성곽도 없고 시간이 없는 상태에서 신립은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새재에 방어전이 최선이었다는 설은 나중 사람들이 아쉬워하며 하던 말일 것이다.
새재는 단순히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길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주막이나 관리들이 쉬던 조령원터가 조선시대 경부대로임을 알려준다. 군사적 방어진지인 경성의 관문으로서 주목받은 것은 임진왜란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임진왜란 때에 침략해 온 일본군 장수들은 거의 멸문을 당했다. 수괴였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사후에 20년도 못가서 도요토미 씨는 1615년 완전히 멸문했다. 침략군의 선봉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는 1960년 세카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직후 멸문당했다. 가토 기요마사(加藤 清正)는 살아남아 구마모토의 영주가 되었지만, 아들 대에서 구마모토 영지를 몰수당하고 가토 가문은 몰락했다. 아무튼 임진왜란에 가담한 일본군 장수들은 한두 가문을 제외하고 거의 멸망하고 지금은 거의 흔적도 없다. 인과응보가 너무 확실하다. 일본은 아직도 그걸 깨닫지 못하니 측은하다.
이런저런 생각에 새재 길을 걸으며 옛날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다. 조령관 아래에 바위굴이 있는데 새재우란 전설이 있다. 바위굴에서 남녀 사랑의 인연이 깊어진다는 곳이다. 비가 쏟아지면 피해야 할 곳으로 두어군데 휴게소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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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모습으로 남아 있는 주막 |
그러나 아쉬운 점은 휴게소가 현대식이다. 옛날식 주막이었으면 했다. 새재의 자연을 보호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을까. 관광지가 아니라 옛날 분위기에서 차나 술을 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다. 새재의 여름 숲은 시간의 흐름을 뒤돌려 주는데 현대식 휴게소가 아쉬움을 준다. 그래도 가족과 함께 다시 오고 싶은 곳이다.
조규상 기행칼럼니스트(재정경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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