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광주의 상처부터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공농성까지… 한 가족의 삶으로 풀어낸 한국 현대사의 이야기
[로컬세계 = 임종환 기자]30여 년 동안 영화 촬영 현장을 누비며 세상의 다양한 모습과 사람들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온 구연모 작가가 첫 장편소설 '시절 향기'를 출간했다.
이 작품은 35미터 높이의 공장 굴뚝 위에서 10개월째 고공농성을 이어가는 해고 노동자 명희의 현재와,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지리산 자락 구례 석산 골의 과거를 교차시키며 인간의 삶과 가족의 사랑, 시대의 아픔, 그리고 희망의 의미를 깊이 있게 그려낸 소설이다.
작품의 주인공 명희는 어른이 된 지 오래지만 소설 속에서 줄곧 '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는 단순히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의미가 아니다. 거짓을 거짓이라 말하고 진실을 진실이라 말할 수 있는 순수하고 정직한 시선을 상징한다.
작가는 어른이 된 주인공을 끝까지 '아이'라고 부르면서 세상의 부조리와 맞서 살아가는 한 인간의 내면에 어린 시절의 기억과 가치관이 얼마나 깊이 자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 굴뚝 위 방울토마토가 불러온 지난 시절의 기억
소설은 삭막하고 위태로운 공장 굴뚝 위에서 시작된다.
비정규직 정리해고에 맞서 자신의 일터와 삶을 지키기 위해 35미터 높이의 굴뚝에 오른 명희. 한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세상과 단절된 채 하루하루를 견뎌야 하는 그의 곁에는 작은 냉면 그릇에 심어 애지중지 키운 방울토마토가 있다.
명희에게 방울토마토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끈이자 희망이며,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과 가족을 다시 만나게 해주는 소중한 매개체다.
방울토마토의 향긋한 냄새는 명희를 지리산 석산 골의 어린 시절로 데려간다. 산과 들, 계절마다 피어나는 풀과 꽃,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땀방울, 그리고 아버지의 기억이 하나씩 되살아난다.
35미터 허공의 차가운 현실과 지리산 산골의 따뜻했던 기억이 교차하면서 독자는 한 사람의 인생에 새겨진 아픔과 사랑을 함께 마주하게 된다.
특히 작은 방울토마토가 척박한 환경에서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듯, 사람 역시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메시지가 작품 전체에 흐른다.
■ 1980년 5월 광주의 아픔, 한 가족에게 남겨진 시대의 상처
『시절 향기』는 한 노동자의 고공농성 이야기만을 다루는 소설이 아니다.
작품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일어난 아버지의 죽음과 그 이후 가족에게 드리워진 '빨갱이'라는 낙인, 세상의 시선을 피해 지리산 깊은 산골로 숨어들어야 했던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삶을 담아낸다.
시대의 폭력은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남겨진 가족들에게도 오랜 세월 지워지지 않는 상처와 고통을 남겼다.
그럼에도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척박한 산골에서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며 모진 세월을 견뎌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흘린 땀과 희생, 쉽게 무너지지 않는 생활의 의지는 훗날 명희가 굴뚝 위에서 버텨낼 수 있는 정신적 뿌리가 된다.
작품은 한 가족의 굴곡진 삶을 통해 한국 현대사의 상처와 평범한 사람들이 감당해야 했던 시대적 고통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 '기다림에도 계절이 있다'… 작품이 전하는 따뜻한 위로
이 소설에서 독자들의 마음에 오래 남는 대목은 어머니가 아이에게 들려주는 삶의 가르침이다.
"봄이 가고 여름이 오면 텃밭에 오이가 열릴 거야. 사람도, 나무도 각자의 계절이 와야 열매가 열리는 거란다. 조급하게 떼쓴다고 금세 열매가 열리지 않아. 시간이 가고 계절이 바뀔 때까지 기다려야지.“
이 말에는 살아가는 일이 때로는 기다림의 연속이며,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시간이 있다는 깊은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남들보다 늦더라도 자신의 속도로 걸어가고, 힘든 현실 앞에서도 꿈과 희망을 잃지 말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은 굴뚝 위에 홀로 남겨진 명희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문학평론가 김영진은 추천의 글에서 이 작품을 두고 "누구에게나 시절 향기는 있다"고 말한다.
또한 주인공이 굴뚝 위에서 견뎌내는 힘은 거창한 이념이나 투쟁의 논리가 아니라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삶, 그리고 역사의 부름을 외면하지 않았던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잘 보여준다. 사람을 끝까지 살아가게 하는 힘은 때로 과거의 따뜻한 기억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르침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 30년 영화 촬영감독의 시선, 문학으로 다시 태어나다
구연모 작가는 30여 년 동안 영화 현장에서 촬영감독으로 활동해 왔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수많은 사람과 공간, 시대의 풍경을 기록해 온 경험은 이번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35미터 높이의 공장 굴뚝과 지리산 석산 골의 짙푸른 풍경, 섬진강과 서시천의 물비늘, 만복대의 억새 군락 등 작품 속 장면들은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하게 펼쳐진다.
특히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이야기 구성은 작가가 오랜 시간 영화 현장에서 쌓아온 영상적 감각과 서사적 경험을 문학적 언어로 풀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서른 해 동안 영화 현장을 누비며 자신만의 철학과 통찰을 쌓아왔다고 밝힌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촬영 기회는 점점 멀어졌고, 새로운 직업을 찾아야 하는 두려움과 현실적인 어려움도 찾아왔다.
그때 작가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손을 움직이지 않으면 영혼이 잠식당한다"는 말이었다.
그는 한동안 묵혀 두었던 이야기의 조각들을 모아 글을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하루 서너 줄에 불과했지만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현실의 고통을 잊을 수 있었고, 글쓰기는 자신을 위로하고 다시 일어서게 하는 힘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마침내 한 권의 장편소설 『시절 향기』로 완성됐다.
■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시절 향기'가 있다
'시절 향기'가 독자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 모두에게는 잊지 못할 어린 시절이 있고, 그리운 가족이 있으며, 다시 돌아가고 싶은 추억의 시간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어머니가 차려준 따뜻한 밥상이, 누군가에게는 고향의 산과 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가족과 함께했던 평범한 하루가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경제적 어려움과 고용 불안, 세대 간 갈등, 사회적 양극화 속에서 많은 사람이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견디며 살아간다.
35미터 굴뚝 위의 명희가 그러하듯, 우리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작가는 말한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고,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계절이 있다고.
작품 속 방울토마토가 척박한 굴뚝 위에서도 열매를 맺듯, 사람의 삶에도 언젠가는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계절이 찾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한다.
구연모 작가의 첫 소설 『시절 향기』는 지나간 과거를 단순히 그리워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의 기억을 통해 오늘을 살아갈 용기를 얻고, 내일을 꿈꾸게 하는 이야기다.
책장을 덮고 나면 독자들은 저마다의 어린 시절과 그리운 가족, 그리고 다시 한번 힘을 내게 했던 소중한 순간들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시절이 있고, 누구에게나 잊히지 않는 향기가 있다.
그 향기는 때로 삶이 힘들고 지칠 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가장 따뜻한 위로가 된다.
35미터 굴뚝 위에서 피어난 작은 방울토마토처럼, 독자들의 가슴속에도 희망의 씨앗 하나가 자라나기를 기대한다.
'시절 향기'는 오늘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게 하고, 다시 내일을 향해 걸어갈 용기를 전하는 따뜻한 문학 작품이다.
임종환 기자 lim46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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